수국이 특별한 이유

우리집 초록 정원 이야기

by 오진미



“쌤 주말 어떻게 보냈어요.”

아침 설거지를 끝내고 한숨 돌리려는데 드르륵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누구지 궁금한 마음에 얼른 받아들었다. 명희쌤이다. 2년 전 구청 글쓰기 수업에서 알게 되었다. 긴 머리에 웨이브 퍼머를 한 언니는 항상 성실히 탐구하는 자세로 강의를 들었다.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손을 번쩍 들고 질문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보는 솔직하면서도 적극적인 모습이 인상 깊었다.


언니를 알고 싶어졌다.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러다 마음을 나누는 소중한 벗이 되었다. 폭염이 기승인 휴일을 어떻게 지냈는지 마음이 쓰였나 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뉴스를 타고 나오는 코로나19의 확산 소식은 아침부터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언니도 하루를 지내는 일이 요즘처럼 어려운 때가 없었던 것 같다며 걱정했다. 고추 따러 시골에 갔다가 궂은 날씨에도 빨갛게 익은 고추를 보니 기분이 좋았다며 힘내고 좋은 하루 보내라며 전화를 끊었다.


마침 연두와 초록의 중간쯤인 수국이 눈에 들어왔다. 5월 초였다. 우리 집에 잠깐 놀러 온 언니가 선물로 잔잔한 분홍빛이 고운 수국 화분 하나를 들고 왔다. 여름 무렵이면 동경하게 되는 꽃이 수국이었지만 쉽게 마음을 열기가 어려웠다. 마음 아픈 기억 때문이다. 수국은 워낙 물을 좋아하는 까닭에 물 주기를 게을리하면 죽어 버린다. 지난여름 휴가로 일주일 정도 집을 비운 사이 보랏빛 수국을 잃었다. 집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베란다로 가보니 이미 생기를 잃은 지 오래돼 보였다. 그 후로는 먼발치서 바라볼 뿐 집으로 들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동안 함께 지낸 시간을 세어보니 4개월로 접어든다. 꽃 색은 어느 사이에 연초록으로 바뀌었다. 옹기그릇에 물을 담고 작은 화분을 담갔다. 언니가 꽃집에서 들었다며 오랫동안 꽃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알려주었다. 수국을 키울 때면 항상 물주는 일에 예민했는데 그럴 일이 없다. 무심한 듯 놓아두었다. 봄을 지나 긴 장마와 푹푹 찌는 여름을 잘 보내고 있다.


수국을 보면 명희 언니가 생각난다. 내가 꽃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서는 가끔 선물했다. 봄에는 향기 가득한 후리지아 한 다발을 또 어떤 날은 집에서 키우던 테이블 야자 화분을 들고 왔다. 오랫동안 기분 좋게 해주는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이었다.


배려가 몸에 밴 언니다. 몇 번이고 말을 놓으라고 해도 존댓말을 한다. 첫 만남에서 그랬던 것 같다. 누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쌤’이라고 서로를 불렀다. 말로 서로를 높이니 만나는 순간마다 여유가 있다. 들어주고 기다려주는 일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가장 솔직하게 맘을 꺼내 놓는다.


언니는 한결같음으로 주변을 비추는 수국과 닮았다. 초록이들만 있던 베란다 정원에 분홍수국이던 시절에는 화사함으로 주변과 잘 어울리더니 이제는 다른 나무들과 묻혀 지낸다. 수국이 어디 있는지를 찾아야 할 정도다.

선물은 마음을 전하는 일이다. 타인을 헤아리는 과정이 함께 하기에 아름답다. 명희쌤의 수국은 지쳐있는 나를 위한 깊은 마음씀이었다. 화원에서 어떤 꽃을 사야 할지 망설였을 잠깐을 그려본다. 몇 번을 고민하다 선택한 꽃이니 특별하다.

어릴 적 수국은 마을 리사무소 뒷편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 있는 어지러운 공간에 피는 꽃이었다. 리트머스 종이에 시약이 번지듯 보라색과 푸른 꽃이 무더기 피었던 풍경이 생생하다. 그때는 꽃들이 우울해 보였다. 햇볕도 잘 들지 않는 어두운 공간에서 나름 애를 쓰고 피었건만 외면당했다. 지금 돌아보면 꽃이 있는 공간의 무거운 공기, 우울한 느낌이 싫었던 게 아닐까. 어른이 되어 보니 수국만큼 은은한 화려함을 갖는 꽃은 드물다는 생각이다. 수국은 어느 곳이든 의미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특별함이 있다.


어느날은 열무김치와 깻잎 김치를 집 앞에 놓고 갔다. 정신없는 내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반찬 걱정을 덜라는 언니의 사랑이 가득 담겼다. 어른이 돼서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받는 일이 어렵다. 적당한 거리로 나를 보호하려고 한다.

“쌤이 내게 잘 해 주잖아요. 나도 누구에게나 그리 착하거나 부드러운 사람은 아니랍니다.”

고맙다고 인사하는 내게 모든 게 오고 가는 것이라며 미소짓는다.


언니에게 참 많은 것을 받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 친정엄마가 가까운 곳으로 이사 온 것 같은 마음이다. 힘든 일이 생기면 냉큼 달려와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샘 언제나 미소짓는 비결은 뭐에요? 샘도 힘들 때가 있잖아요.”

“내가 살아야 하니까요. 화내고 주변 사람 탓해도 아무 소용이 없더라고요. ‘나’를 생활의 중심에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고 나니 삶도 한결 편안해지고요. 내가 할 수 없는 건 흘려보내요.”

샘의 사랑 가득한 미소는 잔잔히 퍼져나가는 수국향이다. 부드러움 속에 숨어 있는 강함으로 여름을 지나 가을, 첫눈 내리는 겨울까지 피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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