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초록정원 이야기 - 고무나무
20일 동안의 방학을 끝내고 아이가 학교로 갔다. 이른 시간부터 동네 친구와 카페로 갔다. 바닐라라떼를 시키고 그동안의 안부를 묻는다. 입안에 거미줄이 쳤던 것처럼 이야기 실타래가 끊임없이 풀린다. 잠깐 카페 벽을 바라보니 고무나무 한 그루가 있다. 잎은 토란 잎처럼 넓고 힘세 보이는 가지가 양팔 벌려 있다. 문득 스친다. 내 오랜 친구 브라운 고, 고무나무다.
두 시간을 쉴새 없이 떠들었다. 역시 사람은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나 보다. 코로나와 방학이 겹쳐 왕래 없이 집에서만 지냈다. 반갑고 신났던 모양이다. 집으로 돌아와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선 순간 브라운 고가 눈에 들어왔다. 결혼하고 엄마가 되고 살아가는 그동안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올해로 결혼생활 14년째, 그중에서 12년을 함께 지냈으니 누구보다 내 삶을 가까이서 지켜봐 온 주인공이다.
어느 가을날 명동 한복판에서 만났다. 테트라팩이라는 친환경 포장재 회사에서 거리 홍보를 진행하고 있었다. 환경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화분을 나눠주었다. 작은 고무나무였다. 일하다 잠깐 머리를 식히기 위해 산책 나왔던 터라 시간이 없었다. 공짜로 준다는 소식에 귀가 솔깃했다. 조급해진 마음에 시계를 보면서도 기다림 끝에 화분을 얻었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아기 고무나무였다. 막 돌이 지난 아기를 이모 집에 맡기고 어둠을 헤치고 출근하는 겨울날에도 그저 묵묵히 나를 기다렸다. 힘없이 축 늘어지는 일도 없었지만 커간다는 느낌이 들지도 않을 만큼 성장이 더디었다. 그래도 아침이면 힘든 나를 위로해 주었다. 회사에서 나를 가장 반기는 이가 고무나무였다.
회사를 그만두었다. 엄마로 아내로 지낸다. 전업주부가 되어 일 년이 지나 둘째를 낳았다. 육아에만 온 정신이 갈 때 나무가 어떻게 커 가는지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가끔 물주는 게 전부였다. 아기일 것만 같던 나무도 조금씩 커간다. 그동안 분갈이를 두 번 했다.
어느 해 겨울이었다. 베란다에 놓인 나뭇잎이 가을 낙엽 떨어지듯 했다. 왜 그럴까 마음이 쓰였지만 괜찮아지겠지 하며 지나쳤다. 놀러 갔던 친구 집에서 답을 찾았다. 고무나무는 열대 식물이기에 겨울에 특히 약하다고 했다. 보온이 되는 실내공간에서 추운 날을 보내야 잘 자랄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다시 집안으로 들여놓았다. 작은 새잎도 돋아났다.
나무도 내 삶의 시계와 같이 움직였다. 막내가 일곱 살 무렵 육아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질 즈음에 고무나무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무심했던 사이 키가 꽤 커 있었다. 가지치기를 안 해 준 까닭에 옆으로 뻗어난 녀석들이 상당했다. 땅으로만 고개를 숙이기에 아파트 전지작업 때 버려둔 가지들을 가져다 지지대를 만들었다. 달걀 껍데기를 돌멩이로 곱게 빻아서 뿌리고 쌀뜨물도 영양 보충하라고 주었다. 연두색 잎이 조금씩 돋아나며 기력을 회복했다.
이때부터 ‘브라운 고’라는 이름도 지었다. 식물 이름 짓기를 좋아하는 막내가 나무의 줄기 색이 갈색인 점과 고무나무의 ‘고’를 따서 지었다. 이름이 생기니 가족 같은 느낌이다. 들판에 자라는 잡초처럼 두었다 몇 년이 흐른 뒤에야 내 마음에 다시 들어왔다. 이때부터 내가 살피고 때로는 말 걸게 되는 친구가 되었다. 이즈음부터 엄마가 아닌 나라는 존재로 살아가는 일에 본격적인 고민도 시작됐다.
브라운 고를 그동안 돌보지 못했기에 멋진 새집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아파트 재활용품 수거장에 있는 큰 토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필시 버린 것이 분명한데 어떡하지 망설이다 냉큼 달려갔다. 적당히 장식이 들어간 화분은 브라운 고에게 안성맞춤이었다. 낑낑대며 들고 와서 나무를 심었다. 옷이 날개라고 했던가. 브라운 고가 달라 보였다. 늠름하고 멋진 우아한 고무나무로 변신했다.
브라운 고는 힘들어도 견디는 법을 잘 안다. 앙상한 가지만 보이다가도 내가 부지런을 떨면 조금씩 회복한다. 그런 위기를 몇 번이나 거쳤는지 모른다. 내 삶의 우여곡절을 함께 겪다 보니 강해졌다. 오늘은 회사 일에 치여 살던 십여 년 전의 내가 생각났다. 그리고 밥하는 일이 전부가 된 것 같은 요즘의 나를 돌아본다. 브라운 고가 바라보는 내 삶은 어떤 모습일까.
우연히 책장을 정리하다 한 장의 메모를 손에 들었다.
‘궁금한가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인가요. 그럼 묻지 말고 하세요.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요.’
책을 읽다 마음에 들어온 글을 적어놓았던 것 같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었던 일을 위해 용기 내어 보는 요즘이다. 그동안 가까운 곳에서 나를 살펴온 식물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