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이 커가는 계절이다. 시골집 돌담 위를 덩굴째 휘휘 올라가 주먹만 한 녀석이 초록빛을 뽐낸다. 불볕더위라고 난리인데 별 상관없이 제 할 일을 한다.
호박잎도 청춘이다. 내리쬐는 햇볕에 내 얼굴을 다 덮고도 남을 만큼 크다. 탁구공만 한 게 보름달처럼 포동포동 찔 때까지 잎도 덩달아 춤 춘다.
여름이면 엄마는 호박잎으로 국을 끓였다. 밭에 다녀오면 세월의 흔적이 물씬 풍기는 낡은 플라스틱 바구니에는 물외며 여러 채소가 담겼다. 호박잎도 단골이다. 잎 하나하나를 살펴서 손질해야 하지만 그리 힘들지 않다. 그냥 먹으면 거친 까닭에 줄기에서 잎까지 가느다란 실 같은 걸 죽 당겨 주어야 훨씬 부드럽다.
손질된 것을 깨끗한 물에 빡빡 씻은 다음 끓는 물에 손으로 적당히 분질러 넣는다. 밀가루 한두 숟가락에 물을 넣어 잘 풀어 국물에 붓고는 집 간장으로 간하면 뽀얗고 부드러운 호박잎 국이다.
“채소를 먹어야 속이 편안하지. 요 며칠 신경 썼더니 속이 답답해서 못살겠다. 이걸 삶아서 저녁에 먹어야겠다.”
엄마는 열무나 얼갈이, 깻잎까지 계절에 나는 것들에 쌈장을 올려 먹었다. 지금 내 몸 상태가 꼭 그런 것 같다.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며 국이 아닌 쌈에 도전하기로 했다. 호박잎 한 봉지를 사고 왔다.
“호박잎 쌈 먹고 왔어. 얼마나 맛있는지 알아?”
여고생 시절 친구가 호박잎 쌈을 점심으로 먹었는데 먹어본 사람만 아는 맛이라고 했다.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이라 친구의 말이 신기하면서도 지나쳤다. 저녁에는 그걸 해 먹어야겠다.
모두가 미식가라 할 만큼 좋은 음식에 관한 관심이 상당하다. 티비를 틀면 주제와 장소 사람들만 다를 뿐 어떻게 하면 최고의 밥상을 차릴지 혹은 그런 곳이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일에 골몰한다. 난 주로 음식점을 찾기보다는 만들어서 먹는다.
먹거리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끌리는 순간, 바로 부엌으로 직행해서 만들 것 같은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가도 희미해진다. 그것이 마음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불안정한 생리다. 당장 해 먹을 것 같았던 호박잎 쌈은 하루 이틀 사흘을 보내고 어제서야 빛을 보았다. 호박잎을 손질하고 찜통에 충분히 쪘다.
억세 보이던 잎이 숨이 죽어 풀 죽은 아이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강낭콩 밥을 올리고 쌈장도 더했다. 손으로 적당히 말아서 잎으로 직행했다. 처음에는 호박잎의 고소함이 밀려온다. 두 번째는 특유의 풀 향이 기분 좋다. 천천히 먹었지만 금세 비웠다. 특별한 반찬 없이 노각 김치와 멸치 고추 조림과 궁합이 맞는다.
여름은 밭에서 나는 먹거리에 주목하는 계절이다. 자고 일어나면 오이와 고추, 상추, 가지가 쑥쑥 자란다. 어디에서 커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침이면 이슬을 머금고 마법처럼 눈에 들어온다.
밭은 전날 내린 비 탓에 습기를 잔뜩 머금었고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신발이 푹푹 빠진다. 처음에는 까만 흙이 묻는 게 반갑지 않다가 한두 번 이어지면 그러려니 한다. 제법 자란 야채를 따는 일에 정신이 없다. 금세 바구니가 가득 채워진다. 가게로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가능한 살림살이였다. 뭔가 부족하다 싶으면 밭으로 갔고 넉넉해졌다.
계절에 민감했던 시골살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떠올려보면 힘들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하는 여름이 그랬다. 어릴 적에는 잠깐 스쳤던 게 커보니 강렬하게 다가온다. 호박잎을 보고 지나치지 못했던 것도 그런 이유다.
부모님은 불편한 마음을 푸성귀로 달랬나 보다. 밥상에는 된장국에 고추며 상추, 콩잎까지 초록이들을 동원했다. 아버지는 한 숟가락 남은 밥을 먹고 나면 언제나 속이 편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누구도 대신해 주지 못하는 힘든 일상의 작은 위로였다. 시끄럽던 가슴속이 찰랑찰랑 잔물결로 바뀌었다. 호박잎 쌈만으로 그리되었다면 과장이다 싶다가도 분명 도움을 받은 것 같다.
요즘 들어 예전에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된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싶다. 머리로 하는 이해가 아니라 절로 가슴으로 와락 안기는 기분이다. 호박잎 쌈이 그러했다. 자연에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는 다짐이 가슴속에 콕 박힌다. 이 계절이 가기 전에 그저 본래의 것을 느끼는 경험을 한 광주리 하고 싶다. 당분간은 호박잎을 몇 번 더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