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잡지를 들췄다. <페이퍼> 여름호인데 외딴 여행이 주제다.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코로나 시국의 우울함이 잔잔히 전해졌다. 집을 나서고 싶다는 간절함 때문인지 글들이 다시 천천히 다가왔고 사진까지 꼼꼼히 챙기며 읽었다.
가끔은 우연히 발견하게 된 작은 것이 마음을 움직일 때가 있다. 책장을 넘기다 끝을 달려갈 무렵 예상에 없던 레시피를 발견하게 되었다. 더운 이 계절만큼은 주방에서 자유로워지면서도 한 끼를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음식에 관한 이야기였다.
유명 레스토랑의 셰프만이 가능할 법한 구하기 힘든 재료 일색인 레시피에는 관심 없다. 내 밥상에 좀처럼 오르기 힘든 것이니 그림의 떡이다. 여름 별미인 냉 우동 기사를 보고 눈을 크게 뜨게 되었다. 방학인 아이들과 점심으로는 그만이었다.
재료에 신경 쓸 일이 없다. 며칠 전에 다섯 개 한 묶음인 사누키 면을 사 왔다.
“점심은 기대해. 엄마가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맛을 보여줄게.”
아침을 먹고 10시 반을 넘길 무렵 아이들에게 큰소리쳤다.
여행이 미뤄진 탓에 아이들 역시 신날 일이 없다. 먹는 즐거움으로 채워야 한다는 엄마의 강한 의지가 싹튼다.
“엄마 어떤 건데. 궁금하다.”
“여기 이 사진 볼래. 일본식 우동인데 맛있겠지.”
잡지의 레시피와 사진을 보여주니 눈이 반짝인다.
아침밥을 먹고 빨래를 너는 동안 미리 멸치 육수만 만들었다. 큰 양푼에 시원한 물을 담고 한두 번 물을 갈아주면서 식혔다. 20여 분이 지나서 시원해질 무렵 통에 담아 냉장고로 직행했다. 11시 반이 지나자 면을 3분 정도 삶고는 차가운 물에 서너 번 씻어내었다. 이제 육수에 간장과 설탕으로 간만 맞추면 된다. 시원하면서도 단짠 한 맛에 어울리게 몇 숟가락을 넣어 맛보고 가감하면 된다.
큰 우동 그릇에 면을 담고 육수를 부었다. 맑은 간장 국물이 흰 면과 대비되면서 어울린다. 붓카케 냉우동은 넉넉한 국물을 보다는 자작하게 부어서 면과 함께 비벼먹는 게 별미다. 면의 쫄깃함과 시원한 국물 뒤에 감춰진 깔끔함에 후루룩 잘 넘어간다.
초록에 왠지 거부감을 보이는 아이들은 그저 국물만으로 충분하다고 한다. 난 삶은 달걀과 송송 썬 파를 올리니 수줍게 핀 접시꽃이나 나팔꽃을 닮았다. 기대 이상으로 손이 바빠진다. 소박한 한 그릇 덕분에 편안하고 좋다.
여름날 음식은 불 앞에 서는 시간을 최소화해야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가족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똘똘 뭉쳤다 하더라도 몸이 힘들어지기 시작하면 함께 어우러져 편안한 한때를 보내기 어렵다. 에어컨을 켜놓고 온 집안 문을 꽁꽁 닫은 채로 진한 냄새가 가득한 음식을 만드는 일 또한 공간에 대한 예의가 아닌듯하다.
여름 음식은 단순하고 가벼워야 자연스럽다. 매일 싱싱한 채소들이 축제를 벌이는 계절이다. 오이며 고추, 상추, 깻잎, 토마토 등 머리에 떠오르는 것만 해도 서너 가지 이상이다. 열을 가해서 먹기보다는 그대로도 훌륭하다. 이것들에 적당히 소스를 버무리면 훌륭한 한 끼가 완성된다.
냉 우동은 젓가락을 들고 면이 아닌 것들에 부딪힐 일이 없다. 오롯이 면과 국물에 집중하게 되는 시간이다. 쫄깃한 면에 간장물이 배어들었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자꾸 당기는 새로움이다.
집에 있는 것들을 꺼내놓고 몇 번 손을 움직이는 일이 전부다. 더 좋은 것을 채워야 훌륭한 맛을 낸다는 생각은 어디에도 없다.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최대한 가벼워지고 싶은 계절에 든든한 친구가 생겼다. 지금도 냉장고 한편에는 붓카케 냉우동 육수가 잠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