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 비밀 책방

곡성<품안의숲>

by 오진미


“어른이 되면 난 공원 한편에 서점을 열고 커피도 팔 거야. 통유리로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는 그런 곳을 만들어서 일하며 살 거야.”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친구들과 커서 어떤 일을 하며 살 것인지 말할 때면 언제나처럼 꺼내 드는 단골 메뉴였다. 가을 단풍잎이 수북이 떨어진 아침이면 빗자루를 들어 쓸고 난 후 커피 한잔을 마시며 하루를 여는 것. 더불어 서점 안에서도 주위 움직임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시원하게 트인 공간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 후로 20년을 훌쩍 넘겼다. 10대의 꿈은 그저 꿈으로 언제인지도 모르게 모습을 감췄다. 여름방학인 아이들과 삼시세끼 씨름하며 지내는 중이었다. 여름이라는 계절이 자꾸 세상 구경하라고 말하지만 가볍게 떠나기도 힘든 상황이다. 고민하다 문득 어릴 적 그리던 숲 속 책방이 생각났다. 검색하다 한 곳을 발견했다. 곡성에 있는 <품안의 숲>이라는 작은 책방이었다.


금요일 늦은 저녁부터 비가 오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굵은 소나기 더니 점차 가늘어져 밤새 내렸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비는 그쳤지만 언제라도 다시 올 태세다. 다른 때 같으면 날씨를 핑계로 다음으로 미뤘겠지만 집을 벗어나고 싶다는 강한 의지에 다른 건 문제가 안 됐다. 여름 여행의 공식을 이날도 따랐다.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출 것.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공간에 첫 방문자가 되는 일이다. 휴일임에도 일찍 아침을 먹고는 서둘러 준비하고 나섰다.

전라도의 땅은 언제나 어머니의 넉넉한 품을 떠올리게 한다. 십 년 전 광주로 이사 와서 도시를 벗어나 시골로 다닐 때면 산과 들판이 나를 살며시 안아주는 기분이었다. 논에는 가을을 향해 열심히 커가는 벼들과 밭에는 빨갛게 익은 고추, 비가 와서 촉촉한 기운은 더위에 지친 마음을 식혀 주었다.


전날 비가 내린 까닭에 곡성을 감아 흐르는 섬진강 물이 제법 불어나 있었다. 흙탕물이었지만 막힘없이 세차게 흘러가는 기운에서 강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곡성읍내에서 20여 분을 달리고 나서야 책방이 있는 마을 입구를 발견했다. 세월교(洗越矯)를 지나니 도깨비마을이라는 이정표가 나왔고, 다시 한참이나 가야 했다. 첩첩산중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농가나 지나는 사람 하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농로인 듯 보이는 좁고 가파른 오솔길을 올라 마침내 책방에 도착했다. 정확히 문을 여는 10시 반이었다.


책방을 향하는 길에서 어린 시절 학교를 끝내고 과수원으로 달려갔던 내가 떠올랐다. 조용하다 못해 정적이 흐르는 그곳에는 온갖 풀벌레 소리로 시끄럽지만,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어 살짝 무서웠다. 그래서 내달렸고 엄마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안도의 숨을 고루 쉴 수 있었다. 책방으로 가는 좁은 길은 시멘트 포장이 되었지만 울퉁불퉁했다. 무성한 풀들 사이에 아직은 초록인 감과 여러 나무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풀과 흙냄새에 빠져들면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비밀의 숲을 찾아 나선 사람처럼 한참을 오른 후에야 그곳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침 책방지기가 출근하는 모양이었다. 연두색 굵은 쇠로 엮어서 잠가뒀던 입구를 열어 주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그래 이곳이야. 너무 좋다”라고 모두가 한 마디씩 한다. 주위에는 우리 네 식구뿐이었다. 비가 오다 그치기를 반복한 탓에 흙은 질퍽거렸지만 어디선가 계곡 물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보니 바로 밑에서 물이 흐르고 있었다.


첫 손님이었다. 주인이 불을 켜고 천정에 있는 선풍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발열 체크와 방명록을 작성한 다음 책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신으니 아는 이의 집에 놀러 간 기분이다. 모두가 원하는 책들을 살피기 바빠졌다. 아무 말도 없다. 책장을 오가며 책을 훑기 시작했다.

“각자 원하는 책 한 권씩 골라서 읽자. ”

나와 아이들은 한 권씩, 남편은 중고 책으로 두 권을 골랐다. 그리고는 작은 테이블이 놓였고 대청마루를 연상시키는 공간으로 직행했다. 내가 원하던 통창이 그곳에 있었다. 책을 보기 전에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산과 나무와 매미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순간이었지만 머릿속을 꽉 채웠던 근심 덩어리와 일상의 이야기들이 사라진다. 언제나 가슴에 두고 있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지금 여기에’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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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정말 좋다. 난 종일 있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서 자고 갈까?”

남편이 푹 빠진 모양이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가 하루 묵고 가자고 할 정도면 최고의 찬사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예약이 비어 숙박할 수 있는지 묻지는 않았지만 준비해 온 게 아무것도 없으니 잠깐 망설여졌다. 아쉬움은 너무 깊었지만, 기다린 다음에 와야 지극한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며 위로하고 미뤘다.


앞에 멀리 보이는 산은 얘기를 잘 들어주는 친구 같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저 “그래”하고 고개를 끄덕여 주리라. 우뚝우뚝 솟아 있는 나무들 사이로 각각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바라보고 바라보면서 서로가 다른 종임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 또한 최고의 선물이었다. 가족이 함께였지만 저마다 책을 읽거나 알아서 할 뿐 말을 시키지 않는다. 함께였지만 서로 독립된 느낌, 그것이 소중한 순간이었다.


자연 앞에서 숙연해졌다. 그저 멍하니 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해결되지 않았던 여러 가지가 정리되었다. 산과 나무와 공기, 새들과 꽃들이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책을 사면 차가 나오는데 우리 부부는 커피를, 아이들은 케모마일을 마셨다. 진한 커피 맛에 빠지다 한번 고개를 들고 다시 책을 읽고 그렇게 반복하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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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던 그곳에 SUV 한대가 들어온다. 아차 싶다. 우리의 시간이 날아갈 때가 된듯하다. 그리 좁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큰 서점처럼 여러 사람이 들어가도 충분할 정도는 아니었다. 갑자기 책방 안이 소란스러워진다. 그래도 우리 일을 할 뿐이었는데, 다시 택시 두 대가 들어온다.

“이제 우리가 나가야 할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이 여기 앉아서 책 읽으려면….”

다시 올 날을 기약하고는 아쉬운 채로 밖으로 나왔다.

책방 입구에 있는 ‘Hug Love Forest’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책방 주인이 이곳에서 느꼈으면 하는 작은 바람 같은 게 아닐까. 내리막길을 내려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가족사진을 찍고는 남는 건 사진뿐이라며 추억을 휴대전화에 담기 시작했다. 서점은 그저 책을 읽는 공간이 아니었다. 책이라는 분명한 대상을 통해서 다시 새로움을 발견하게 되는 보물창고가 아닌가 싶다.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마음이 텅 비어 있어 홀가분해지는 가벼움이 새로 시작할 용기를 내게 전했다. 그저 무심한 듯하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는 산과 그 동무들 앞에서 배워가는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산길을 달려 다시 도시 속으로 들어가면 지금의 생각이 다시 가물거려 허우적댈 수도 있지만, 그때는 참으로 따듯했다. 가을이 되면 꼭 그곳에 가서 하룻밤 자면서 책과 숲의 향기에 취하고 싶다. 며칠이 지났지만, 그곳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친정집을 가듯 기대고 싶은 공간의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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