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잼 만들며 알게 된 것
냉장고를 열어 저녁 찬거리를 꺼내다 우유가 눈에 들어왔다. 눈은 달력을 향하고 사 온 지 꽤 된 것 같다는 불안감이 스친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이 지났다. 컵에 조금 부어 맛을 보니 원래 우유 맛이다. 이미 우유에 대한 믿음에 다른 것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선뜻 먹으라고 하기가 그랬다. 나 혼자 먹기에는 별 탈 없겠지만 엄마 마음이 작동한다.
우유 잼이 생각났다. 작은 통에 만들어 두었던 것을 다 먹은 지 오래다. 다시 잼을 만들기로 했다. 몇 년 전에 <슈퍼 레시피>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낯선 일이었기에 적혀 있는 데로 따라 했지만 갈수록 계량하는 일에 거리를 두었다. 집에 있는 남은 우유를 가지고 하는 것이기에 눈짐작과 느낌에 의지했다.
저녁 준비를 대충 마치고 나서 냄비에 우유를 비웠다. 900밀리리터 팩에 한 컵 정도를 마셨을 뿐이니 우유가 가득이었다. 중간 불에서 우유를 끓인다. 가끔 생각나면 저어주기만 할 뿐이다. 설탕을 다섯 숟가락 정도 넣었고 중간에는 적당히 쏟아부었다. 그래도 잘 만들어질까 하는 조바심도 없다. 그저 되겠지 하는 여유를 부린다.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듣도 보도 못했던 우유 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땐 책을 몇 번이나 보고 레시피대로 설탕을 넣고 집중하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너무 강한 불 때문에 우유가 넘쳐나 수습하며 진땀을 뺀 적도 있다. 포기하지 않고 불 옆에서 보초를 서다 보니 우유가 졸아들고 제법 크림이 되어갔다. 그때가 딱 적당한 행복감이었다. 맛을 보니 너무 달았고 상상하던 맛과는 거리가 멀었다. 달콤함이 전부인 하얀 잼이었다. 잘하려는 마음에 오래 끓인 탓에 냉장고에 두니 너무 딱딱해서 먹기 힘들 정도였다.
첫 실패작은 지나고 나면 역시나 많은 배울 거리를 남긴다. 설탕을 너무 많이 넣으면 이상적인 맛을 찾기 어렵다는 것과 적당히 대충 해야 오히려 잘 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검증되지 않은 나만의 법칙이 생겨났다. 그 후에도 한두 번을 더 만들었고 이번이 네 번째다. 이제 가을로 접어드니 우유만으로는 심심했다. 홍차 잎을 넣기로 했다. 가끔 생각날 때마다 먹는 얼그레이로 결정했다. 차가운 우유에 온기가 돌고 살짝 거품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에 잎을 풍덩 하고 빠뜨렸다. 중간 불에서 약한 불로 가만히 두니 넘치지도 않고 소리 없이 바람에 우유와 홍차의 향이 함께 날아온다.
저녁 설거지까지 마쳤다. 갈색 설탕에 홍차까지 더해지니 낙엽색처럼 진해진다. 후루룩 마시면 될 우유에 점성이 생기기 시작했고 절반으로 줄었다. 저녁 운동을 가야 할 시간인데 잠깐 망설였다. 나갔다 오면 혹시 잼에 문제가 생기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아주 약한 불로 두고 20분만 돌고 오기로 했다. 비가 그친 뒤로 나무는 가로등 불빛 아래서 더 기운찼다. 사람들은 혼자 혹은 부부가 반려견과 산책로를 열심히 오간다. 집에 일을 남겨 두었으니 마음이 더 바빠진다.
“엄마 그러잖아도 연락하려고 했지. 송이가 계속 우유잼 어떻게 되는 것 아니냐고 해서.”
큰아이가 집으로 들어서는 내게 그동안의 상황을 조곤조곤 설명한다.
냄비로 달려가 보니 딱 적당한 상태다. 지금이 불을 꺼야 할 시간이다. 더 욕심을 부리면 지금은 좋지만 오래 두고 먹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시간을 두고 먹는 것이기에 현재보다도 미래를 생각하는 헤아림이 필요하다. 적당히 물기가 있는 상태에서 멈춰야 촉촉한 잼을 오랫동안 만날 수 있는 소박한 비법이었다. 6시 반 무렵에 시작된 일이었으니 두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끝이 났다.
모자란 듯할 때가 최고의 적정시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의지를 갖고서 매달려서 완벽에 가까운 성과물을 내야 하는 순간도 있지만, 일상에서는 살짝 서툴러도 괜찮다. 이미 그 과정에서 어제보단 손톱만큼이라도 나아갔을지도 모르니까. 잼 역시 살짝 미완성으로 보일지라도 그대로 남겨 두어야 그 자리가 자연스럽게 채워지는 듯하다. 시간이 선물하는 특별한 맛을 경험할 기회다.
다음 날 아침 아이들은 환호성이 터졌다.
“엄마 이 잼 그동안 만든 것 중에 최고야. 완전 촉촉하고, 홍차 잎이 있어서 더 좋은 거 같아.”
아침을 먹고 30분이 지났을 무렵 식빵에 잼을 잔뜩 올려 먹는다. 어쩌다 타이밍이 맞았을 수도 있다. 100미터 달리기 하듯 전력 질주보다는 적당히 멈추는 것. 우유 잼을 만들며 빈틈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본다. 냉장고에서 머물다 사라질 우유가 잼으로 새롭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