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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Nov 11. 2021

감추고 싶은 내 마음처럼,
유부 주머니

  

입동을 보냈다. 며칠 전부터 들려온 일기예보가 적중한 듯하다. 춥다. 속을 따뜻하게 해 줄 겨울날의 음식이 생각난다. 머릿속으로만 그렸던 그것을 한번 만들어 봐야겠다.  저녁 시간은 다 되어가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별 재료가 없다. 때로는 있는 것만으로 음식을 완성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다. 소박하지만 뜻하지 않게 특별한 맛을 발견하기도 한다. 지난겨울에 담근 김장김치를 꺼냈다. 아침에 된장찌개에 넣다 남은 두부도 불러들였다. 주인공인 꽁꽁 언 유부도 초대했다.    

  

유부 주머니를 만들기로 했다. 단출하게 신김치를 송송 썰고 두부를 으깨어 버무려서 속을 채우기로 했다. 담백한 맛을 위해 유부를 끓는 물에 데치고, 다시 차가운 물에 씻어내었다. 주머니가 되도록 한쪽 면을 조금 잘라내어 구멍을 만들었다. 찻숟가락으로 속 재료를 천천히 채워 넣었다. 평소에는 그리 차분하지 않은 내가 이 순간만큼은 고요하리만큼 진지하고 여유 있게 하나씩 완성해 갔다.     

20여 분이 지나니 홀쭉했던 유부가 제법 통통해진 게 귀엽다. 마지막으로 주머니 안에 든 것들이 나오지 않도록 꼭꼭 묶어줘야 한다. 엄마가 보내준 쪽파 몇 가닥으로 한번 돌리고 난 뒤에 파가 뜯어지지 않도록 조심히 동여매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뿌듯하다. 누르스름한 유부 빛에 가려서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가 없는 모습이다. 다른 이가 보면 속 재료가 궁금해질 것이 분명하다.      


그동안 도전해 보지 않은 음식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혼자 하는 일이 이처럼 재미있었던 적이 별로 없었다. 밖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찬 기운이 휘감아 돌 때 나만의 속도로 이것을 만드는 기분은 특별했다.     

유부 주머니를 앞에 두고 이것이 꼭 숨기고 싶은 내 마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살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일들이 펼쳐진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고, 고민해 보지만 별도리가 없을 때도 많다. 이런 날은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약속이 있을 땐 나가야 한다. 취소할까 하다가도 오래전에 정해 놓은 것이라 갑작스럽게 변경하기도 어렵다. 

     

오랜만에 만난 이를 앞에 두고서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웃고 얘기하는 내 모습이 스친다. 그 순간을 충실히 보내려는 노력이기도 하지만, 그냥 보이고 싶지 않은 나를 살짝 감추는 것. 마치 유부 안에 무엇이 들어있든 간에 겉은 다소곳한 주머니만 남는 것처럼 말이다.     


솔직함을 좋아하지만 때로는 마음속에 두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런 견딤의 시간이 필요하고, 얼마를 보내고 나면 자연스럽게 꺼내놓고 말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가슴속에 그것이 맛있는 유부 주머니가 아니어서 아쉽지만, 때로는 살아가는 동안 소중한 삶의 지혜가 될지도 모른다.      

멸치육수 국물에 물만두 몇 개와 굵은 가래떡, 유부 주머니를 넣고 보글보글 끓였다. 넘치지 않는 담백한 맛이다. 아이들은 유부 주머니가 신선한지 설레는 얼굴이다. 유부 주머니 두 개와 물만두 3개, 두부, 떡 두 조각이 한 그릇에 담겨 하루를 정리하는 저녁을 마감했다. 가끔은 예상치 않게 음식을 만들다 혼자만의 생각 속으로 빠져든다. 유부 주머니는 깜짝 이벤트 같은 저녁을 선사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를 보게 되었다. 밥하는 일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어쩌면 나를 만나는 시간 같다. 유부주머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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