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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Nov 12. 2021

섬의 가을을 꾹꾹 눌러 담은 하루

 

1년 하고도 9개월 만이었다. 드디어 비행기를 탔다. 마음만 먹으면, 돈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던 일이 내게서 멀어졌다. 처음에는 몇 개월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여겼다. 사계절을 보냈고 다시 봄이 돌아오고부터는 그리움이 되었다. 텔레비전 속 그곳은 맑고 싱그러웠으며 따뜻했다. 그토록 바라고 기다리던 엄마가 있는 고향 집에 다녀왔다. 

     

미리 계획을 세우면 변수가 너무 많이 생겼다. 마음속으로 몇 개의 날짜를 정해두고서 선택하기로 했다. 남편과 아이들, 가족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또 다른 일이 다가와 미뤄지는 불상사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  

    

떠나기 이틀 전에야 알렸다.

“우리 금요일 저녁에 제주도 할머니 집 가. 알았지.”

“엄마, 정말 가는 거야? 진짜? 정말이지? 이번에는 꼭 가는 거지. 이러다 또 금요일에 못 가게 됐다고 하는 거 아니지?”

그동안 코로나 상황에 따라 자꾸 미뤄지는 일을 경험한 막내는 믿기지 않는 눈치다. 힘주어 말했다.

“이번엔 정말 가자. 엄마도 너무 가고 싶어. 꼭 갈 거야.”     


금요일 오후 2시까지 일을 마쳤다. 프린트된 자료를 보는데 글자가 흐릿하게 다가온다. 몇 주 동안 노트북 앞에서 씨름했던 탓인지 시력이 안 좋아진 기분이다. 그만 봐야 할 시점이었다. 집을 대충 치우고는 갈 준비를 했다. 2박 3일의 일정이다. 저녁에 가서 일요일 아침에 오는 것이니 온전히  토요일 하루를 보내고 오는 셈이다. 짧게 머무는 만큼 짐이랄 것도 없다. 각자 백 팩에 잠옷과 양말 정도만 챙겨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찾은 공항이다. 시끌벅적 요란하다. 밖에서 볼 때는 조용했는데 어디에 이리도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는지 앉아 있을 빈자리가 없다. 아이들은 처음 온 사람처럼 들떴다. 출발 게이트 앞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그제야 고향으로 향하고 있음이 실감 났다. 우리가 가려할 때마다 코로나는 최고치의 확진자 수를 기록하며 불안하게 했다. ‘마스크만 잘 쓰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다 혹시나 하는 걱정에 선뜻 용기를 내기가 어려웠다. 백신을 맞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은 무뎌졌다. 옆에 앉은 이가 위험인자로 느껴질 때마다 마스크를 코 위로 단단히 올렸다.     


잠깐 눈을 붙였을 뿐인데 벌써 도착이다. 하늘에 머무는 시간은 30분 남짓이다. 이렇게 짧은 시간이면 올 수 있는 이곳이 저 멀리 유럽의 어느 나라를 가는 것처럼 오래 걸렸다. 제주 공항을 환하게 비추는 불빛들 속에서 사람들의 힘찬 발걸음이 더해져 활기가 넘쳤다. 제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바람의 맛과 시원하면서도 기분 좋은 공기가 온몸에 전해진다.  

    

동생이 그리웠던 언니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짙은 어둠을 달리는 차 안에서 어렴풋이 주변 풍경이 다가왔다. 귤이 익어가는 섬은 저녁이어서 조용했지만 힘차게 깨어있었다. 아침이 되자 온 가족이 엄마가 일하는 과수원으로 갔다. 귤은 제법 주황색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한편에는 고구마와 무가 커가고 있었고, 여름을 보낸 고추도 비닐 가득 따서 넣었다. 내일이면 집으로 가져가 며칠 동안 우리 식탁에 오를 소중한 찬거리다.     


점심에는 바다를 보러 나섰다. 파스타를 먹고 싶어 하는 막내의 얘기를 듣고 식당을 찾았는데 30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힘을 빼고 느린 걸음으로 근처 바다로 향했다. 빨간 등대가 아름다운 하례의 바다도 겨울 채비를 하고 있었다. 바닷바람은 언제나 그러하듯 사나웠고 그리 높지 않은 파도가 일었다. 흐린 하늘과 바다가 짝꿍을 이뤄내는 모습이 여러 생각에 빠져들게 했다. 예전에는 몰랐던 그토록 보고 싶던 바다였다. 짭조름하면서도 시원한 갯내음이 좋았다.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 내게 머물다 간 어려움을 보내고, 잘 지내왔다고 어루만져 주는 듯했다. 남편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이나 먼 수평선을 바라본다.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휴식이었다.     


바다와 가까운 과수원 한편에 있는 카페도 다녀왔다. 단호박 파운드케이크와 레드벨벳 케이크의 깊은 맛에 빠져들었다. 아이들은 진한 초콜릿 음료로 우리 부부는 커피를 마셨다. 멀리 서는 한라산이 보였고 초록 잎사귀 사이로 보이는 귤과 적당히 싸늘한 바람은 들썩였던 마음을 가라앉게 해 주었다. 카페가 자리한 마을은 중학교를 다니는 3년 동안을 부지런히 오갔던 곳이다. 과수원과 나무가 우거져 사람들 사이에 가려졌던 곳들이 사람들의 손을 거쳐 새로운 공간으로 탄생했다. 이방인의 시선으로는 매력적이지만 어린 시절 머물던 내게는 어색했고, 낯설다. 투박해 보였고 볼품없다고 여겨졌던 그때를 어렴풋이 머릿속으로 그리다 보니 그 시절이 그리웠다.  

   

바닷가 주변은 말끔히 정비되었다. 도로에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카페들이 늘어서 있다. 조용했던 그곳 풍경이 너무나 많이 바뀌었다. 내게는 조금 멀어진 느낌이다. 해안도로를 달렸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는 펜션이 자리 잡았고, 망중한을 즐기는 카페가 또 있다. 내가 그동안 알았던 그곳인지 물음을 던지게 했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에는 풀이 여기저기 자라고 돌무더기가 키를 훌쩍 넘길 만큼 있던 곳, 바닷가는 때로는 황량한 분위기였다. 이제 바다는 가만히 있으려 해도 사람들이 쉼 없이 찾아오기에 옛날보다는 덜 외로울까 싶다.    

 

중산간으로 차를 돌렸다. 멀리 보이는 한라산과 더불어 억새가 조용히 춤춘다. 밭에는 겨울을 보내고 더 단단해질 월동 무가 크고 있었다. 도로 양옆에 늘어선 삼나무들은 여전히 하늘을 닿을 듯이 큰 키로 바람에 흔들리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누구의 손을 거치지 않아서 더 아름다운 곳. 야트막한 오름이 보이고 돌담과 올망졸망 늘어선 밭, 메밀꽃이 한창이었고 가끔 이름 모를 카페 간판이 보였다. 이제야 고향의 땅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엄마의 과수원도 그러했다. 두 달 정도 지나면 시장으로 나갈 한라봉은 쑥쑥 잘 크고 있었고, 과수원도 여전했다. 모두가 변해가지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내가 그토록 원하고, 느끼고 싶었던 제주의 품이었다.  

    

새벽에 깨었다. 다시 돌아가야 하는 일요일이다. 진한 어둠을 걷어내려 하는 하늘에서 별이 쏟아진다.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북두칠성이 보이고 싸늘함 속에서도 맑은 공기가 정신을 깨어있게 했다. 땅을 딛고 있는 집에서 자는 몸은 편안했고, 무엇이든 밥상에 오르는 것은 맛있다. 수돗물은 부드러워 손을 씻어도 촉촉하다. 새벽에 깨서 종알대던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왔다. 시계를 보니 4시다. 엄마는 이른 시간부터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식탁 의자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 중에서 가장 그립고 소중한 엄마와의 새벽 수다다. 엄마가 만든 아침 반찬을 조금 건넨다. 20여 년이 지나도 내 답은 한결같다.

“엄마, 진짜 맛있어.”

“넌 언제나 맛있다고만 하지.”

엄마의 손맛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침밥을 서둘러 먹고 공항으로 향했다. 7시 무렵 이슬이 내려앉은 도로 주변으로 가을은 깊어갔다. 차 창밖 풍경에 빠져든다. 그립고 그리워서 왔던 시간이 이제 막을 내린다. 나를 감싸주었던 고향의 계절의 향기를 꼭꼭 눌러 담고 간다. 이제는 머릿속으로 그려볼 정도로 시간이 지났다. 오감으로 다가왔던 제주 섬에 흠뻑 젖고 싶다. 그곳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겨울이 깊어지면 다시 달려가야겠다. 흰 눈 속에 핀 붉은 동백을 만날 그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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