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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Jan 04. 2022

처음이라는 셀렘, 귤 마멀레이드

    

겨울은 귤과 함께 하는 시간이다. 커다란 귤 그림이 들어간 주황색 10킬로그램 상자가 바닥을 살짝 보일 즈음이면 전화한다.

“언니 우리 귤 다 먹어가. 보내줘요.”

“응 알았어. 내일 보낼게.”

우리 집은 엄마가 부지런히 과수원을 지키고 있는 덕에 귤의 계절이 돌아오면 귤 상자가 비는 날이 없다.     


귤은 껍질을 까서 먹는 게 전부였다. 가끔 잼을 만들기는 했지만 신경을 쓴 노동에 비해선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눌어붙지 않도록 불 앞에서 보초를 서서 만든 나 역시 멀리할 만큼 인기가 없다. 아주 가끔 만들었고 잊고 있었다. 주스 또한 믹서기에 놓고 갈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때문인지 찾는 일이 드물다.      

새벽부터 깬다. 피곤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면 4시 반이면 눈이 떠진다. 더 잠을 청해도 이미 내게 허락된 잠자는 시간은 다 채워졌는지 정신이 맑다. 방을 나서 거실에 불을 켜고 나면 노트북 앞에 앉는다. 작업해야 할 게 있어서 시작하려다 포털에 올라온 한 이미지가 눈에 들어왔다. 귤 마멀레이드 만드는 동영상이었다.     


그동안 알고 있던 귤과는 또 다른 맛을 경험하게 된다는 솔깃하게 하는 문구가 뒤따른다. 짧은 내용이라 잠깐 살폈다. 아주 간단했다. 귤에 묻어 있는 농약 성분을 깔끔하게 씻어내는 조금의 수고로움과 설탕,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마음과 몸은 하나라고 하는데 이를 절감하는 요즘이다. 머릿속이 복잡할수록 몸도 힘들어한다. 크게 불편하진 않지만 계속 상쾌하지 않은, 적당히 무겁고 지친 느낌이 휘어 감았다. 아침 운동을 다녀오고 나서 식탁에 앉아 음악을 듣다가 갑자기 베란다에 있는 귤 상자가 눈에 들어온다.     


망설임 없이 귤 여섯 개를 들고 왔다. 처음 시도하는 것이기에 실패할 확률을 생각해서 조금만 하기로 했다. 귤에 베이킹파우더를 묻히고 빡빡 씻어서 헹구었다. 그다음엔 식초를 몇 방울 떨어트린 물에 다시 귤을 5분 정도 담가 두었다. 그리고는 다시 흐르는 물 손으로 귤 곳곳을 살피며 다시 씻어내었다.   

함께 넣을 설탕의 무게를 대강이라도 알기 위해 저울에 귤을 올렸다. 귤 여섯 개의 무게는 700그램을 넘겼다. 귤에 설탕이 잘 들어가도록 포크로 콕콕 작은 구멍을 만들었다. 냄비에 귤을 넣고 잠길 만큼 물을 붓고는 설탕을 넣었다. 귤 무게보다 설탕을 적게 넣고는 한 시간 반 정도를 끓였다. 처음에는 강 불로 끓기 시작한 후에는 중간 불로 은근히 졸였다.  불이 너무 강하다 생각하는 순간 폭포수 같은 시럽 물이 넘친다. 마음이 급했나 보다. 설탕 녹은 물은 끈적했다. 이것이 가스레인지 주위에 있으니 달고나 만들어지는 냄새가 난다. 

     

날이 추워 문을 조금 닫고 끓이는 중이다. 귤이 익어가는 향이다. 어릴 적 과수원에 귤 따러 가면 추운 날에는 주위에 있는 나뭇가지들을 가져다 모닥불을 피웠다. 큰 돌을 주위에 둘러서 불씨가 날아가지 않도록 한 다음 오가는 길에 손을 녹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불 사이에 귤을 몇 개씩 집어넣었다.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 아버지는 재가 묻은 장갑 낀 손으로  구운 귤 하나를 건넨다. 그리 맛있지 않았다. 따뜻한 귤은 어색했고 신맛이 강했다.  살을 파고드는 칼바람에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 시절 풍경이 그려졌다. 마멀레이드 만드는 따뜻한 공기가 그때의 귤 익는 냄새다.     


조금씩 물이 졸아든다. 처음 시작했던 것보다 많이 줄었고 귤의 빛깔도 투명해지면서 설탕이 들어가니 빛나기 시작했다. 살짝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맛보았다. 부드러운 달콤함에 귤 향이 입혀졌다. 절반 이상으로 줄었을 때 불을 끄고는 사각 유리통에 담았다. 딱 여섯 개가 들어갔다.     

큰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다. 내 몸을 움직여 만든 것인데 설레게 한다. 포크를 들어 살짝 맛을 봤다. 껍질의 쓴맛은 사라지고 없다. 대신에 촉촉하면서도 쫀득쫀득했다. 스치는 바람처럼 유자 향도 감돈다. 하루 중 가장 보람찬 일을 해 낸 것처럼 뿌듯하다.    

 

설탕에 잘 조려진 귤은 늦가을 나무에서 잘 익은 홍시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닮았다. 자꾸 생각나는 단맛이다. 귤의 속살만을 가지고 만드는 잼과는 달리 껍질까지 함께하니 그저 달콤함으로 끝나지 않고 씁쓸한 끝 맛이 머문다. 그래서 더 깔끔하다. 단맛은 종종 지겨워지기 마련이지만 그것과는 다른 분위기를 전한다. 하나의 귤을 온전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어 재미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날이었다. 해야 할 일은 있지만 속도는 더디었고 자꾸 다른 것들에 눈과 손이 갔다. 그러던 중 귤 마멀레이드를 만드는 잠깐은 소꿉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양이 적으니 힘을 들일 것도 없다. 처음이니 실패해도 괜찮았고, 잘 되면 그저 좋을 것 같았다. 태어나서 먹은 귤 양만 해도 상당할 터인데 마멀레이드는 처음이었다. 가끔 빵에 올려진 마멀레이드를 먹었다.  

   

다른 일에는 호기심이 별로 없다. 음식을 만드는 것과 식물 키우기, 사람들이 만드는 공간을 관찰하는 일, 이 세 가지가 주요 관심거리다. 그래서였을까. 소파에 가만히 눕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몸은 귤을 가지러 가기 위해 몇 걸음을 움직이고, 손은 더 부지런히 재료를 준비하는데 나섰다. 이럴 땐 신기함이 마저 든다.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었음에도 시작하면 마법처럼 몸에 생기가 돈다.      

내가 한 일이지만 무엇이 나를 여기로 이끌었을까 싶다. 마음이 끌리는 것, 좋아하는 일은 이런 게 아닐까? 날이 추워 아직은 귤 마멀레이드를 밖에 두었다. 오랜만에 바게트 하나를 사서 마멀레이드를 올리고 먹었다. 입안에서 바사삭 빵의 살아있는 소리가 힘차다. 유난히 빛나는 귤의 속살은 찬 기운을 뚫고 우리 집 거실로 들어온 햇살처럼 참 예쁘다.      


올겨울에는 이걸로 행복해지고 싶다. 커피를 두고 치아바타나 딱딱한 호밀빵, 때로는 우리 막내가 좋아하는 옥수수 식빵 위에 마멀레이드 조각을 올려야겠다. 마멀레이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좋은 기운이 다가오는 듯하다. 이것의 달콤함을 가끔 만나며 겨울을 가볍게 지냈으면 한다. 아이들은 벌써부터 다 먹으면 다시 또 만들자고 난리다. 최소한 40년 이상을 함께 해온 귤이 이렇게 달리 보인다. 이런 날은 매일 머무는 내 부엌이 고맙고 아름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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