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진미 Mar 28. 2022

27번의 밥상

코로나 자가격리 집밥 풍경


  

예상치도 않은 일이 생겼다. 남편이 금요일 저녁 퇴근하더니 목소리가 이상했다.

“목이 아픈 거 아니야?”

“무슨, 오늘 여러 곳에서 설명해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목을 많이 써서 그래.”

그 말이 진실이어야 했다. 그런데 새벽 잠결에 욕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상해서 살펴보니 남편이 목이 까끌까끌하다며 가글을 하고 있었다.

“여보, 그만하고 나와봐, 혹시 코로나 아냐? 어떡하지”

“아, 아닐 거야. 코로나라니.”

남편은 단호히 아니라고 했다. 콧속을 면봉으로 문지른 다음 검체 추출액에 넣고 나서 키트에 3방울을 떨어뜨렸다. 가슴이 너무 두근거렸다. 제발 분홍색 선명한 한 줄에서 멈추기를 기다렸는데 그건 단지 바람이었다. 다시 희미한 한 줄이 보였다.

“여보, 코로나 같아. 어서 마스크 쓰고.”     

문어숙회 밥상 

남편이 토요일 오전에 확진 판정을 받았다. 온 식구가 놀랐고 다들 자기 방에서 격리에 들어갔다. 다음날 막내의 선생님께 가족 확진 사실을 알렸더니 등교하기 위해서는 신속항원검사보다는 PCR 검사를 받는 게 좋겠다고 했다. 오후에 아이들과 함께 보건소로 가서 검사를 받았다. 모두가 아니라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집에 돌아오고 나서 큰아이가 잠을 잔다고 했는데 두 시간을 훌쩍 넘길 때까지 깨지 않는다. 이상해서 들어가 봤더니 열이 39도다. 진단키트로 확인해 보니 남편과 똑같은 표시다. 아이는 너무 당황스러운지 눈물까지 터트린다.

“엄마, 내가 코로나라고? 해야 할 것도 많고 학교 가야 는데.”

아이를 진정시키고 급히 방을 나왔다. 나와 막내는 다행히 음성이었다. 남편과 큰아이는 일주일 격리에 들어갔다.  

   

말로만 듣던 코로나가 우리 집을 덮치니 혼자 동분서주다. 먹는 일이 가장 정신없었다. 삼시 세끼를 집밥으로 챙겼다. 처음에는 어쩌다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금세 진정했다. 잘 먹어야 빨리 회복할 거라는 믿음이 가장 컸다. 지금 계산해 보니 어제까지 27번의 밥상을 차렸다. 중간에 간식까지 챙긴 횟수를 헤아려 보면 족히 40회 이상을 먹는 일에 힘을 쏟았다. 이럴 땐 어디에서 에너지가 생기는지  부지런한 밥 잘하는 엄마가 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중심 요리는 다른 것으로 상을 채웠다. 거의 매일 장을 보았고,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의견을 물어 반영하려 했다. 대부분 내 맘대로 인 밥상이었지만.     

9일간 집밥 풍경 중에서 

주말도 아니고 평일에 이렇게 열심히 밥을 해 본 적이 있던가 싶다. 식사시간이 가까워지면 자동으로 음식을 만들고 나서 작은 쟁반에 찬들을 놓으면서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났다. 내가 영양사가 된 기분이랄까? 물론 전업주부이기에 밥을 챙기는 일은 몸에 밴 습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반복되는 일의 지겨움보다는 새로움이 찾아들었다. 반찬을 만들고 국을 끓이고, 여러 잡곡을 넣은 밥을 지으면서 마음은 다른 시선으로 향했다. 이것을 먹고 나서는 오늘보다는 편해진 내일을 맞이했으면 하는 바람 같은 게 생겼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어떤 재료가 서로 궁합이 잘 맞을지 그려보았다. 어느 때 병원식사에 플레인 요구르트가 나왔던 기억이 떠올라 그것도 상에 올렸다. 몸에 좋다는 토마토와 브로콜리, 시금치는 꾸준히 이어졌다. 몇 가지를 더 만드는 게 손이 많이 가면서도 가지런히 담긴 모습을 보면 편안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건 안정감을 주었다. 어떤 날은 정말 잘했다고 스스로 칭찬할  정도였다. 

“감동이야, 맛있게 먹었어.”

남편이 한마디 건넬 때면 밥 한 그릇이 주는 행복을 조금 알 것 같았다.     


밥처럼 사람을 위로해 주는 게 있을까 싶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는 너무 어렵고 신나는 일이 없을 땐 밥 먹는 시간만을 기다렸다. 일요일에 단짝 친구와 도서관에 공부하러 가서도 이른 점심을 먹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다닥다닥 붙어 앉은 도서관 열람실 공기는 탁했고, 공부가 잘 안 될 때 탈출구는 점심 먹는 일이었다. 갑자기 옛 생각이 나면서 격리 기간 역시 비슷하다 여겨졌다. 지루한 하루가 되지 않도록 밥을 제대로 준비하기로 했다. ‘격리’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는 상당하다. 요즘에는 코로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럽게 사용하지만 어찌 보면 정말 간단하지 않은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한 공간에 혼자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것과 동시에 아프다는 현실은 그리 간단치 않은 여러 가지를 포함한다. 남편보다 아이가 더 아팠다. 평소 같으면 말끔히 비웠을 그릇에 남아 있는 음식을 보며 힘든 정도를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주는 밥상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빵으로 시작한 토요일 

난 내 일에 대해서 그리 좋은 평가를 하지 않는다.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고 그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나를 확인하려 했다. 7일간의 격리 기간 가족 앞에 놓였던 밥상은 나를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내 손을 거쳐 간 그것들이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고, 왜 그래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누가 뭐라고 평가하지 않아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으니 그만이었다. 무슨 마법을 부린 듯 시간은 흘러 모두가 학교와 회사로 떠난 오후에 그때를 떠올려 보았다. 휴대전화를 들어 혼자 기분 좋아 찍어 두었던 음식 사진을 살폈다. 체크무늬 쟁반 안에 담긴 음식들은 저마다 이야기하고 있었다. 엄마가 보내준 문어숙회가 올랐던 화요일과 곰탕이 주인공인 수요일, 흐린 날 전을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파전을 만들었던 금요일, 평소와 같은 휴일을 그리워하며 빵으로 시작했던 토요일 등 사진 속 밥상에 내가 담겨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이 처음엔 당황스러웠고 차츰 익숙함으로 다가왔다. 이번의 일을 겪으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해야 할 일을 이어가는 것이 시간을 보내는 좋은 방법임을 배웠다. 다시 저녁을 준비해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나와 식물 그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