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날
대추차를 끓입니다

예민한 몸과 마음을 달래는 시간

by 오진미


10시를 막 넘겼다. 오늘도 심상치 않다. 매일 비가 내리던 그때는 해님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그 날은 지나고 매일 집안 온도계가 30도 이상 오르는 일상이고 보니 하루를 보내는 일이 두렵다. 아이들은 벌써 덥다고 난리다.

“엄마 에어컨 켜면 안 돼.”

“엄마 땀이 삐질삐질 흘러.”

두 아이가 앞서거니 뒤서가니 간절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망설이다 에어컨 플러그를 꽂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기분 좋은 시원한 온도다.


올여름은 이상하리만치 에어컨이 싫어졌다. 좀 덥다 느껴지는 기분, 땀을 흘려버리는 게 편하다. 날이 후텁지근해도 에어컨 바람이 싫다. 몸에서 반응하기 때문이다. 팔과 다리가 서늘하다고 감지하고 그다음이 편도에서 싸한 느낌이다. 예민한 내 몸이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요즘 같은 시기에 병원 가기도 망설여진다. 그동안 내가 쌓아온 내공으로 위기를 극복하리라 마음먹고 행동에 들어갔다.


우선 따뜻한 생강차 마시기다. 지난겨울 담근 생강차의 마지막 병이다. 하루가 다르게 줄어가더니 이제 바닥을 살짝 드러낸다. 마트에 가면 언제든지 손쉽게 찾을 수 있지만 내가 만든 맛을 따라가지 못했다. 요즘은 아껴서 가끔씩만 먹는다. 물을 끓여 생강 반 스푼을 넣고 마셨다. 목안이 따뜻해지면 생강의 알싸한 기운이 기분 좋게 한다. 그러다 갑자기 대추가 생각났다. 냉동실에 반년은 잠자고 있는 대추 몇 봉지가 있다. 해마다 겨울이면 대추고와 대추차를 만들어 하루에 몇 잔씩 마셨던 터다. 대추차의 적당한 달콤함과 고소함, 부드러운 목 넘김이 좋다.


오뉴월 손님이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말에 100퍼센트 공감한다. 손님이 올 일도 없고 누구를 대접하기 위해 하는 일도 아니지만 시작부터 살짝 망설여진다. 그래도 내 몸이 우선이다. 용기를 내었다. 대추를 큰 볼에 담았다. 식초를 넣고 몇 번이고 싹싹 씻은 다음 냄비에 물을 넣고 대추를 푹 끓였다. 처음에는 강한 불에서 끓기 시작하면 중약 불에서 은근히 달여 주면 끝이다. 그리 손이 가는 일도 아니지만 날씨 탓에 부담이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이다. 불을 켜고 조금 있으니 주위 공기가 데워진다. 이마에 뚝뚝 땀이 흐른다. 시간이 어서 흘렀으면 좋겠다.


이토록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가족에 대한 과한 애정 혹은 사명감 때문이다. 엄마는 아프면 안 된다. 학교를 못 가는 아이들의 삼시세끼는 물론 요즘 컨디션이 안 좋은 남편을 챙기는 것도 내 몫이다. 내가 앞서 염려하는 부분이 크다. 모두가 내 일로 보인다. 내가 아니면 어렵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일까. 몸이 예민해지니 기분도 그렇고 아이들에게 짜증이 늘어난다. 대추가 내게 힘을 줘야 할 텐데 말이다.

약 불로 한 시간을 넘기니 대추알이 부서지며 부드러워진다. 여기에 아끼던 생강차를 넣었다. 내 맘대로 대추차다. 대추는 껍질이 얼마나 단단한지 적당히 푹 끓인 것 같아도 부드럽지 않고 거칠다. 입안에서 자꾸 걸려 부담스럽다. 두 시간을 끓이고 나서는 맛이 궁금해졌다. 목을 넘기며 깜짝 놀라게 하는 뜨거움이 온몸으로 퍼진다.


하루 종일 불을 켜 놓는 일도 어렵다. 불을 끄고 고운체에 대추차를 부었다. 그러고 나서 조금씩 물을 부어가며 대추 속살만 녹아들게 몇 차례 반복했다. 대추의 고운 살이 물과 함께 휘감아 돈다. 냄비에 한 가득이다. 든든한 지원군을 만난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다. 나를 건강하게 해 줄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이토록 건강에 신경 쓰는 내가 안쓰럽다. 좀 아플 수도 있는데 벌벌 떠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다. 워낙 걱정과 불안을 달고 사는 습성이 굳어진 결과다. 불안은 현재보다 미래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루를 잘 지내기도 어려운 일인데 말이다.


대추차를 예닐곱 잔은 마셨다. 몸에 기운이 난다. 가장 시원한 무엇을 찾는 계절에 오히려 따뜻한 차로 마음을 달랜다. 호호 불어야 한 모금 마실 만큼 뜨거운 게 오히려 얼음을 베어 문 듯 기분 좋다. 이열치열인가. 대추차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를 위로해 주었나. 너무 더운 나머지 무섭다는 감정이 달아나 버린 것일까. 아마 차를 만드는 시간, 대추를 곱게 씻고 적당한 물과 불을 살피며 집중했던 시간이 온갖 잡념에서 해방시켜 준 게 아닐까. 언제나 고개를 쳐들고 나를 괴롭힐 불안과 걱정이라는 녀석과 친해지는 법을 배워야겠다.

어느 스님의 말이 생각났다.

“마음을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듯이 바라보세요. 현재에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알기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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