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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Apr 15. 2022

환상의 짝꿍, 오이 양파

 한 그릇 음식이 친구로 다가올 때


        

친구는 언제나 내 얘기를 들어줄 것 같다. 부담 없이 편하게, 문득문득 생각나는 단어 친구다. 이 관계가 사람 사이에만 존재할까. 어느 저녁이었다. 빨리 만들 수 있는 반찬 하나를 생각했다. 제법 맛이 오른 오이 하나를 냉장고에서 꺼내어 반달 모양으로 썰었다. 왠지 하나가 더 필요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 전부터 세상에 얼굴을 내민 햇양파였다. 한 손에 가득한 양파의 부드러운 껍질을 벗기니 새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스테인리스 볼에 이 둘을 놓고는 든 생각이 친구였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오이생채를 할 때는 양파와 함께였다. 오이만 있을 때는 부족한 듯하고 아쉽다. 이때 양파의 아삭하고 부드러운 매운맛이 더해져야 제맛을 낸다. 난 이 둘을 친구라 부르기로 했다. 어릴 적에는 몰랐다. 밥상에 오르는 것도 함께하는 벗이 있어야 빛나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이와 양파는 김밥과 라면, 떡볶이와 튀김처럼 서로 어울린다. 봄이 깊어지는 이 계절이면 장을 볼 때 오이와 양파에 눈이 간다. 친구란 단어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을 일컫지만, 이들도 나와 오래 지냈다. 그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면 당연히 아주 어릴 때다. 대여섯 살 무렵이었을까?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나 아련할 만큼 옛날이다. 엄마는 봄이 오면 집 뒤에 있는 과수원 한편, 우영이라 불리는 그곳에 찬거리가 될 만한 것들을 빼곡히 심었다. 가장 중심은 상추와 오이다. ‘조선 오이’라 불리는 수분함량이 높은 통통한 것도 있었고, 삐죽삐죽 여린 가시가 특징인 가시오이가 뒤를 이었다. 그중에서 가시오이는 무침으로 사랑받았다.     

엄마의 무침 스타일은 소금과 고춧가루 조금, 깨와 식초였고 여기에 어김없이 양파가 등장했다. 이 반찬은 어린아이에게 그리 마음이 가는 것이 아니었다. 한편으론 밥과 김치, 된장국이란 공식에서 벗어나기에 신선했다. 여름이 다가올 무렵에  상에 오른 새로운 먹거리는 흥미를 자극했다. 한번 먹고 이어 다시 젓가락을 들다 보면 익숙해진다. 그러다 어른이 되고 나니 나만의 스타일이 조금씩 만들어졌다. 엄마처럼 담백하지는 않지만, 적당히 끈적임이 있는 고추장이 중심이다. 엄마의 것이 겨울에서 봄으로 오는 서늘함이 남아 있는 듯한 깔끔함이 특징이라면 난 여름의 끈적임이 가득하면서도 한입에 강하게 밀려오는 달콤 아삭한 맛을 즐겼다. 이때부터 양파는 필수였고 이 둘이 만나야 오이무침이 완성됐다. 그러니 이들도 어떤 날 내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가끔 가까운 이들을 만나면 평소와 다르게 많은 이야기를 쏟아낼 때가 있다. 마음을 쓰게 하는 큰일이 있거나, 타인에게 위로나 공감받고 싶을 때, 그리움이 밀려오는 날이면 나타나는 보통의 현상이다. 이때 친구를 떠올린다. 혼자 있을 때 채울 수 없는 것들이 둘이어서 가능하다. 자유롭게 거리를 거닐다 카페에 홀로 앉아 커피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피다 어느새 다른 이를 떠올린다. 그건 아마도 내 생각을 친구의 입을 통해서 지지받고 싶은 바람이며, 에너지를 얻기 위한 자연스러운 태도다. 내가 오이 혼자만은 어색하다 여기고 엄마가 그러했듯 양파 반쪽을 듬성듬성 굵게 채를 썰어 섞어 제맛을 내는 무침을 만들고 싶은 것과 비슷하다.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며 살아가는 일은 아이부터 세상을 다 알 것 같은 나이 지긋한 어르신까지 언제나 고민거리다. 이럴 때 얼마 동안 얘기하고 통하는 대상을 떠올리기만 해도 든든하다. 둘이 눈빛을 나누고 서로의 가슴속 이야기를 듣다 보면 오롯이 나였을 때 보다 안정적으로 변한다. 풍부한 시선으로 주변을 살피며 살아가게 되는 건 덤으로 얻은 소중한 삶의 태도다.

    

조용한 봄날 집안 공기는 아직 선선하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난 스카프를 목에 빙빙 두른다. 벽시계를 보고 11시 반을 넘길 무렵이면 무얼 먹을까를 고민한다. 혼자여서 간단하게 먹고 싶지만, 기분은 내고 싶을 때 오이와 양파를 꺼낸다. 겨울의 오이와는 달리 제법 맛이 들었다. 아삭하고 달콤하다. 양파는 맑간 얼굴을 드러낸다. 빨간색이 매혹적인 고추장에 매실청을 더하고 식초, 깨를 넣고 버무린다. 마무리는 엄마표 고소한 참기름 한 방울이다. 밥과 무침이 밥상 위에 오르면 언제 밥그릇을 비웠는지 의식 못 할 만큼 순식간에 시간은 흐른다. 작게 천천히 밀려오는 행복감, 이들이 나와 친구가 되었음을 전하는 싱그러운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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