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깨운 아침 요리
부엌에 오래 머물 여유가 있다는 건 가끔 뜻밖의 생각을 전한다. 양파, 무, 토마토, 오이까지 식탁에 종종 오르던 야채들에 대해 내 마음이 담길 때가 그렇다. 이들은 그저 맛있는 한 그릇의 음식으로 탄생해서 속을 든든하게 채워주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할 때가 있다. 한편으론 반갑고 다른 면에서는 작은 식재료에 이렇게도 마음을 쓰면서도 정작 주위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아 아쉽다.
아침에 애호박이 그렇게 보인 날이었다. 이건 사계절 마트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어느 계절이 제철 인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엄마가 호박씨를 심었던 봄날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싹을 틔우고 자라는 시기가 여름, 가을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어느 곳에서나 애호박은 비슷한 크기로 선택되기를 기다린다. 조금씩의 차이가 있을 뿐 균형 잡힌 튼튼함을 자랑한다.
언제나 애호박의 겉은 꽉 낀 비닐 옷을 입고 있다. 아마 상품성을 높이기 위한 농부들의 전략인 듯하다. 호박이 커가는 과정에서 얼마나 힘이 들까 싶다. 아마 아주 조그만 크기였을 때 비닐 안에서 자라니 자연스럽게 비닐이 주는 공간만큼만 크는 게 당연하다 여기겠지만 말이다.
애호박은 어디 구부러지지 않고 곧게 자랐기에 요리하기에도 편리하다. 식감이 부드러워 볶음이나 전, 찌개 어디에도 잘 어울린다. 속살의 연한 노랑과 껍질의 연둣빛은 식탁을 빛나게 한다. 별다른 요리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달걀을 꺼내놓고 나서는 무심결에 동그랗게 호박의 절반 이상을 썰어 두었다. 갑자기 멈춰 보니 도마가 호박 세상이다.
내게도 뭔가를 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일지 않는 날이 있다.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쉽게 피곤해 오는 요즘이다. 자주 가는 한의원 원장님은 기력이 쇠해서 그렇다고 하는 데 동의하면서도 슬프다. 이런 날은 부엌에서 정말 멀어지고 싶다. 그럼에도 익숙한 주부의 행동은 자동으로 반복된다. 그렇게 해서 호박을 썰었나 보다. 자발적으로 움직였을까 하는 물음이 생길 만큼 억지스러웠지만, 몸을 움직이다 보면 신기하게 기운이 난다.
애호박 하나를 두고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이 나를 깨웠다. 블로그에서 애호박 무늬를 이룬 달걀말이를 본 적이 있다. 그걸 해 볼까 잠시 망설이다 우선 달걀을 깨뜨려 넓은 볼에 풀었다. 그다음 애호박을 둥글고 얇게 썰어 둔다. 팬에 달걀 물을 부었는데 생각했던 그림이 아니다. 순간 고민하다 애호박을 하나씩 둥그렇게 둘러 돌돌 말았다. 애호박전은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맛이 될 거라 예상했다.
몇 분이 지나 계란말이를 도마에 올리고 조심스럽게 썰었다. 하나를 들어 살피니 모양이 예쁘다. 당연히 애호박의 연둣빛과 노란 계란이 따뜻한 봄날의 느낌이다. 단아하고 참하게 계란 사이에 호박이 박혀있다.
'애호박 샌드'라고 이름 지었다. 정확히 말하면 애호박 계란말이가 어울릴 듯했지만 내게 보이는 모습은 비스킷 사이에 여러 종류의 크림을 넣은 과자들과 비슷했다. 그것에 비해 달지 않고 담백하고 부드럽다. 하나를 들어 먹어보니 잘 알고 있지만 새롭다. 별생각 없이 만들었는데 모양이 흐트러짐 없이 완성될 때는 잔잔했던 마음마저 일렁일 만큼 기분이 좋다.
입안에서 아삭아삭하는 호박이 살아난다. 익숙해진 것들에서 잠깐 거리를 두거나 때로는 다른 시선으로 접근해 보는 것은 뜻밖의 선물을 전한다. 애호박 하나로 작은 에너지가 싹이 터서 내 가슴 안에서 커가는 기분이다. 어제보다 씩씩하게 하루를 지낼 힘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