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의 기억 일상을 만들다
오이는 여름을 닮았다. 초록이면서도 연하고 충분한 수분을 갖추고 있어 더운 날에 잘 어울린다. 마늘과 양파를 항상 집에 두는 것처럼 더워지기 시작하면 오이를 챙긴다. 오이만 있으면 언제나 순식간에 반찬을 만들 수 있다. 다른 것 없이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냉장고 야채 박스에 있던 오이 두 개가 살짝 얼었다. 밖에 두니 진한 색을 보이는 언 부분과 그렇지 않은 게 선명히 대비된다. 얼었던 것을 도려내어 남은 것으로 오이나물을 만들었다.
오이는 그냥 날것으로만 먹는 줄 알았다. 직장을 다니던 언니가 어느 휴일에 오이나물을 만들었다. 얇게 반달 썰기 한 다음 소금을 살짝 뿌려 절이고 나서 물을 짜내고 마늘과 식용유를 넣고 달달 볶았다. 초등학생이던 난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그 맛이 어떨지 궁금했다. 접시에 담자마자 하나를 집어 먹었다. 분명 오이인데 고소하면서도 따듯하고 부드러움이 생것과는 달랐다.
여름 무렵이면 오이나물을 종종 식탁에 올린다. 먹고 싶다며 주문하는 이가 있는 건 아니다. 나를 위한 반찬이다. 깔끔하면서도 투명한 초록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 짓게 한다. 음식을 만들다 보면 양념과 재료가 섞이는 게 대부분이지만 이건 선명히 오이가 들어온다.
오이는 순수와 어울린다. 오이나물은 무엇을 더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려는 노력이나 억지스러움은 없다. 그저 어디에서 바라봐도 오이다. 마늘냄새가 스쳐 가지만 오이 향을 덮어버릴 만큼 힘이 세지는 않다. 순한 오이가 주인공이다.
기름에 오이 볶는 향이 은은히 퍼져나간다. 다른 식구들은 모르는 나만의 즐거움이다. 아주 잠깐이면 끝나는 요리다. 팬 앞에서 들인 시간에 비해 결과는 훌륭하다. 마음만 있으면 언제나 가능한 반찬이다. 맛 또한 평균값을 유지하는 소박하지만 흔들림 없는 맛매다.
아침에 톳 밥을 지어먹었는데 오이나물과 잘 어울렸다. 혼자 신났다. 어릴 적 오이나물을 만난 그때의 첫 느낌이 오래 기억되었다. 지금처럼 여름이 문을 열려고 하는 때였다. 시골의 반찬은 언제나 초록이었고 그 속에서 오이나물의 인상은 강렬했다.
다시 무엇을 해본다는 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 있어야 한다. 밥상을 차리며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드는 건 그동안 내가 살아온 삶의 순간을 꺼내어 보는 일이었다. 언니가 해준 오이 나물이 없었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오이를 썰고 팬을 달궈 만들어 볼 생각을 했을까? 30여 년도 훌쩍 흐른 그때의 우리 집 부엌 풍경을 불러왔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언니가 휴일의 점심을 준비했던 초여름이었다. 부모님은 바쁜 일을 잠시 멈추고 식사를 하며 쉬었다.
내 이야기는 이렇듯 음식으로 채워져 있는 부분이 많다. 먹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누군가 책의 한 구절을 소중히 간직하듯 그동안 경험했던 요리를 생각하며 새롭게 펼쳐 보이는 걸 즐긴다. 하루는 먹고 살아가는 일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이어진다.
오이 두 개를 가지고 소중한 추억을 꺼내 보았다. 글을 쓰면서 내가 좋아하는 요리에는 아름다운 에너지가 흐르고 있음을 알았다. 여름이면 과수원 한편에는 오이가 자랐다. 씨가 굵고 통통한 토종 물외라 불리는 것부터 요즘 마트에서 만나는 가시오이가 있었다. 엄마가 씨를 심는다. 며칠 지나면 오이 싹이 돋아나고 꽃피고 열매가 맺어 커갈 무렵이면 여름은 깊어졌다. 오이 나물이 액자 속에 담고 싶은 그 시절의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