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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Jun 21. 2022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

나를 위로해 주던 공간



  

토요일 8시를 조금 넘겼다. 덕수궁 대한문 앞은 공사 중임을 알리는 안전 보호막이 설치되어있다. 던컨 도넛은 그대로다. 몇 년 만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5년은 족히 지난 듯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야 이곳에 오게 되었다.  

    

익숙한 곳이지만 낯설다. 다시 찾아오기까지 걸린 시간만큼의 어색함인 듯하다. 이종사촌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온 일정이었다. 서울은 멀지도 않지만 가깝지도 않다. 마음처럼 자주 오갈 수 있는 길이 아니기에 새벽부터 집을 나서 KTX를 타고 올라왔다. 첫 방문지로 시청역 주변을 택했다.     

남편과 아이들은 다소 들떠 보인다. 평소라면 집에서 식빵 몇 조각을 굽고 조금의 샐러드와 우유를 두고 아침을 먹고 있을 시간이었다. 같은 하루이면서 사는 곳을 멀리 벗어난 것만으로도 특별했다. 난 그들 사이에서 지난 내 일상이 떠올랐다. 매일 아침 회사에 일찍 출근하고, 집으로 가면 육아에 정신없는 워킹맘이던 시절 이곳은 내게 잠깐의 휴식처가 되었다.     


종종 밖에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내 일이었다. 약속은 대부분 오후 두 시를 기점으로 정해질 때가 많았다. 일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기 전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생기면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이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회사에 바로 들어가기는 너무나 싫었다. 오 가는 시간을 고려해 허락된 선물이었다. 회사에 가는 순간 밀린 일에 다시 바빠질 건 분명했다. 누가 봐도 일정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선택한 자유이며 일탈이었다.     


겨울이 아주 가까운 늦은 가을 오후였다. 사계절 모두가 매력적이지만 덕수궁의 가을은 따듯하면서도 평화롭다. 도심 속에 자리 잡은 작은 숲을 연상시키는 궁궐은 그림이었다. 혼자 잠깐 은행잎 떨어진 궁내를 거닐다. 던킨 도넛으로 발길을 옮겼다. 커피와 도넛 한두 개를 들고 자리를 잡았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의 맛은 도넛과 찰떡궁합이다. 통창으로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거나 정면으로 보이는 서울시청사를 멍하니 바라본다. 다이어리를 꺼내어 몇 자 적어보다가 그것도 귀찮다. 그냥 달콤한 도넛과 커피를 먹는다.  

    

그곳에서 머무는 시간은 30분 정도다. 그 이상을 있고 싶지만 현실은 허락하지 않을 때가 많다.  상사의 뭔가 석연치 않은 눈빛도 생각나고 해야 할 일도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면 일어나서 자리를 벗어나야 하는 때다.      

가끔은 덕수궁 돌담길을 조금 돌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작품을 봤다. 입구에서부터 진한 붉은색의 꽃 조각 작품이 강렬하다. 울퉁불퉁한 야트막한 언덕길을 올라가면 미술관이 있다. 무슨 전시가 열리는지도 모른 채 들어선다.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또 다른 세계에 온 기분이다. 안과 밖이 철저하게 구분되어 일상에서 멀어지게 하는 찰나가 좋았다.     

 

마음이 움직일 때면 경향신문 빌딩까지 올라갔다. 단풍이 깊어질 무렵이면 이국의 어느 곳에 여행 온 분위기를 전한다. 천천히 누구를 신경 쓸 일없이 거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덕수궁을 중심으로 해서 돌담길과 신아빌딩, 정동교회로 이어지는 산책로는 내가 찾기만 하면 반겨주는 고마운 곳이었다. 


지금처럼 여름의 그곳을 가 본적은 별로 없었다.  축축한 습기를 머금은 길은 초록의 나무와 잘 어울린다. 내가 걸었던 그때와 길은 그리 변한 게 없다. 예전에는 안보이던 카페가 늘었다는 것 말고는.  혼자 설레었고 두근거렸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서울에 왔다는 사실만으로 즐거워했지만 난 십여 년 전의 나를 다시 바라보게 되어 그랬다. 


일이 힘들다고 가슴속에는 사표를 써 두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아이를 아침 일찍 이웃 아주머니에게 맡기고 아직은 한산한 동네 횡단보도를 건너 영등포구청역에서 지하철을 타고는 을지로입구역에 내려 회사로 부지런히 걸었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행운 같은 날이 찾아오면 덕수궁과 그 주변을 거닐었다.       


온 가족이 8시부터 문을 여는 카페로 들어가 커피와 샌드위치로 아침을 먹었다. 우리보다 일찍 온 이들이 벌써 자리를 잡고 뭔가 얘기를 나누기에 바쁘다. 막내가 좋아하는 크림 브륄레도 함께다. 10시면 문을 여는 미술관에서 천경자 컬렉션과 다른 전시를 감상했다. 푸른 유리벽돌 강하게 뇌리에 남는 프랑스 작가 장-미셸 오토니엘 <정원과 정원>도 만났다.      

서울시립 미술관 장 미셸 오토니엘 <정원과 정원>

추억 속의 공간을 천천히 걸으며 그때와 지금의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바랐던 꿈들이 어느 만큼 펼쳐져 있는지 말하기 어렵다. 꿈은 깊은 밤 침대에 누워 꾸었던 한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린 게 많다.  다시 가을이 오면 그땐 홀로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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