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진미 Jun 26. 2022

여름을 나눠 먹던 날

살구와 블루베리가 알려 준 것들


    

엄마는 작은 산을 이룬 파인애플 사이에서 몇 개를 고른다. 파인애플 농사를 짓고 첫 수확하는 날이었다. 크고 빛깔이 고운 것 서너 개를 소쿠리에 담는다.

“이거 큰 집에 갖다 주고 올래? 이건 작은할머니 집에 가져갈 거고.”

“엄마, 이렇게 좋은 거로 줄 거야? 좀 작은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니야, 누구를 줄 때는 가장 좋은 걸 줘야지. 안 좋은 건 받는 사람도 별로야.”

타인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을 때면 초등학교 6학년 초 여름 무렵의 이 날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삼십여 년이 지난 이야기다.      


엄마는 콩알 한 짝도 나눠 먹자는 주의다. 쉽게 만나기 어려운 생선이나 고기, 귀한 과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큰댁에 보냈다. 우리가 먹기 전이었고 그렇게 마음을 나누려 했다. 다시 무엇을 돌려받을 것을 염두에 둔 일은 아니었다. 엄마는 그렇게 살았고 지금도 몸을 움직여 일군 것들을 나눈다.      


어느 시골 고등학교에 갈 일이 있었다. 학교의 일을 기록하기로 했고 선생님을 만나서 얘기를 듣는 일이 중심이었다. 학부모도 함께 만나기로 했다. 장마가 시작되어 멀리 보이는 산 어디쯤부터 비가 몰려오는 느낌이다. 일기예보는 오후부터 비가 내린다고 했으니 바로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다.     

선생님이 전한 살구와 블루베리

빗소리가 들린다. 교육에 상당한 관심인 엄마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여러 생각이 오갔다. 비가 제법 굵어졌는지 크게 들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빨리 정리해서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아 마음이 바빠진다. 한 시간은 족히 운전해야 하기에 초보운전인 내게는 또 하나의 숙제가 남은 셈이다.    

 

“오늘 학교 운동장에서 딴 거예요. 이거 드셔 보세요.”

선생님이 블루베리와 살구가 담긴 하얀 플라스틱 통을 건넨다. 농약이나 비료 없이 자란 블루베리와 살구는 작지만 건강해 보였다. 눅눅한 날씨에  학교와 집을 오가는 일은 간단치 않았다. 생각보다 일은 빨리 진행되지 않아 물을 잔뜩 먹은 스펀지 같은 마음이었다. 시간이 가는 것만큼이나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쌓였다. 날씨만큼이나 불편한 기분이었는데 작은 통을 받아 드는 순간 반가움과 고마움이 뒤섞이며 내 얼굴이 환해졌다. 환대와 배려, 따뜻한 마음이 살구와 블루베리의 고운 색에 담겨있었다.      


“이제 비가 많이 내릴 거라네요. 어서 가 보세요.”

좀 전까지 얘기를 나누던 학부모가 갈 길이 멀다며 마음을 써 준다.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기에 서둘러 가방을 챙겨 들었다. 이십여 분 내리던 비는 점차 빗줄기가 약해졌고, 집 근처에 다다르니 땅은 바짝 말라 있었다. 집에 오자마다 과일을 씻어서 접시에 놓고는 아이들과 나눠 먹었다.

“오늘 갔던 학교 선생님이 준거야. 이건 토종 살구라는데. 엄청 달콤하대. 먹어볼래?”

아이들과 둘러앉아 얼마 안 되는 것을 나눠 먹었다.      


작은 통의 크기보다 더 많은 것들이 가슴속에 채워졌다. 무덥고 습한 날씨와 전쟁 중인 내게 잘 자란 여름의 결실은 여유를 주었다. 세상의 존재하는 여러 가지가 봄에 꽃 피워 열매가 맺히고 이렇게 커 가는 것처럼 힘들어도 제 할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는 것. 그것을 전한  이를 다시 떠올렸다. 일을 위해 몇 번은 더 만나고 한동안은 연락을 주고받아야 하는데, 이전보다는 편하게 소통할 수 있을 것 같다. 몇 알 안 되는 여름 과일을 나누는 이라면 타인에 대해서도 정성스럽게 대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심으로 주변을 대했던 엄마가 불현듯 떠올랐다.  

작가의 이전글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