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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Jul 12. 2022

시간을 배려한 묵은지 김밥

여름날 김장김치 맛




여름날 김장김치는 낯설지만 쓰임이 많다. 밭에서 갓 따온 상추와 오이, 고추 같은 싱싱한 야채가 어울릴 것 같은 계절이다. 김치 담던 날 날씨가 어떠했는지 가물가물해질 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는 엄마가 보내 준 양으로는 부족해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내 일이 되었다. 겨울보다는 봄을 보내고 여름이 다가올 무렵에 더 기대된다.      


음식을 만들면서 시간을 배려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엄마처럼 된장이나 간장을 담그는 일도 없고, 집 앞에 떨어진 동백 열매를 주워서 기름을 짜러 간 적도 없다. 그저 시장을 보고 와서는 바로 몇 시간 후에 밥상을 차리거나 냉장고에 두었다 며칠 후에 먹는 게 전부다.  몇 날 며칠의 시간을 들여서 만들거나 준비하는 일은 거의 없다.

   

김장 김치는 이런 것들과는 다른 의미다. 며칠 혹은 한두 달로는 낼 수 없는 깊은 맛을 찾아 기꺼이 시간을 보낼 준비를 한다. 김장을 몇 번 경험해 보니 절임 배추에 고춧가루 양념이 가득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도 알았다. 마늘과 액젓, 양파와 사과 등 몇 개의 기본 재료만으로 양념을 만들고 설렁설렁 버무려 두어도 되었다.   

그저 가능한 범위에서만 한 소박한 김장은 오히려 온갖 것들을 동원한 것보다 시원해서 배추의 맛을 잘 전했다. 넘치지 않기에 배추가 양념들을 더 열심히 흡수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지난겨울 12월 어느 날에 만들었던 김치는 지금 꺼내 보면 겉으로 보는 빛깔은 그저 그렇다. 양념이 적다는 것을 알고는 두 번째 통에 들어가는 것부터는 대충 버무렸다. 그래야 남아 있는 배추에 모자라지 않고 마무리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김장김치는 양념이 많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 당장 먹을 게 아니니까. 조금 희멀겋게 해도 여름에 꺼내 먹으면 맛있어. 오히려 그 맛이 좋아서 양념을 조금만 하는 사람도 있더라.”

언제나 삶의 지혜를 알려주는 위층 언니가 어느 해 겨울에 김장 때 고춧가루가 모자랄 것 같다는 내 얘기를 듣고 알려주었다. 요즘에 먹는 김치는 언니의 말에 딱 맞았다.     

 

김치는 시큼하면서도 담백하다. 배추는 아삭하면서도 적당히 달콤하다. 다른 것을 더하지 않아도 깊은 맛이 난다. 김치통에서 한 포기를 꺼내와서는 도마에 놓고 썰 때마다 흐뭇하고 뿌듯하다.      


다른 식구들은 이 김치에 담긴 이야기를 모르는 것 같아 가끔은 얘기한다.

"이 김치 있잖아. 작년 김장 김치야. 이거 마트에서 사 먹으면 이런 맛 안 나올걸?”

으쓱함이 목소리에도 배어 나온다. 남편은 그저 “그래?”라는 말 뿐이다. 무슨 의미인지 모를 답이다. 

    

일요일 아침에 이 김치를 가지고 김밥을 만들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습관처럼 생각나는 게 김밥이다. 우리 집 김밥은 너무 간단하다. 비법이라면 집에 있는 것만 넣는다. 그럼에도 빼놓지 않는 건 김장 김치다. 매실청을 조금 넣고 기름에 살짝 볶아낸다. 여기에 계란과 유부 조림만 넣었다. 붉거나 초록이 없으니 김밥 색은 그리 끌리지 않는다. 비가 내릴 것 같으면서도 내리지 않는 후텁지근한 날의 내 기분 같다.     


이건 언제까지나 맛보지 않았을 때의 느낌이다. 둥근 김밥 한 조각을 먹고 나면 생각이 변한다. 치우침이 없는 적당한 맛. 화려하지 않지만 내공이 느껴진다. 김치가 큰 역할을 했다.      


김치를 담글 때는 언제나 절임 배추를 주문해 놓고 망설여진다. 평소보다 많은 양념을 준비해야 하는 과정이 귀찮다. 그럴 때마다 해가 바뀌어 무더울 때 새 김치통을 열 때의 설렘을 기억하려 한다. 해마다 세 개의 김치통을 꽉 채운다.     


김밥 여섯 줄을 만들어 아침을 먹었다. 김치가 없었으면 이런 맛을 경험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과거의 수고로움에 대한 고마움을 내게 전한다. 그러면서 다른 일에도 이런 마음이 미쳤으면 좋겠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 다가올 시간을 조금이라도 밝게 할 수 있는 것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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