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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Jul 14. 2022

덜 사랑해서 토마토 비빔면?

일의 무게를 덜어준 점심을 생각하며


  

아침이면 그날 기대할 일을 먼저 떠올린다. 별다를 것 없는 시간 속에서 기다림은 지금 해야 할 것들의 무게를 줄여준다. 8월 초까지 마쳐야 하는 일이 있다. 몇 년간의 기록을 정리하는 것인데 빨리 진행되지 않는다. 정해진 날짜까지 마무리 지어야 하는데 꾸준히 이어지는 건 달력을 보고 일정을 점검하는 과정이다. 며칠 전에 하루의 분량을 정해놓았고 그것을 하면 되지만 자꾸 달력에 써 놓은 계획표가 눈에 들어온다. 마음이 급해지고 하기 싫은 마음이 끼어들었다.       


이럴 때마다 먹는 것을 떠올린다. 내가 좋아하는 빵이나 최근에 갔던 브런치 카페의 분위기와 한 그릇에 담긴 음식을 그린다. 그러다 다시 서너 시간 후면 다가올 점심 메뉴를 고민한다. 내게 무언가를 먹는 일은 휴식이며 기쁨이고 나를 진정시키는 최고의 한때다. 별 다방을 가기도 하지만 코로나가 재확산에 접어들었고, 몇 시간 이상을 같은 자리에서 하고 있으면 몸에서 불편하다는 신호를 보낸다. 이런 까닭에 대부분은 집에서 작업 중이다.      


나만의 공간, 집이어서 가능한 음식을 떠올린다. 다른 여름에 비해 올해는 비빔면 사랑이 대단하다. 정확히 기록해 두지 않았으니 가물가물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은 점심으로 이것을 먹는다. 선반에서 비빔면을 꺼낼 때마다 드는 생각은 내 손이 별로 가지 않으니 절반의 요리지만 맛은 그 이상인 썩 괜찮은 먹거리라는 것. 이것저것을 고민하던 난 비빔면을 먹기로 했다.   

토마토 비빔면

이것이 지겹지 않은 것은 내 취향과 우리 집 냉장고 상황에 맞춰 변신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난 그저 비닐 속에 담긴 면과 소스만으로 한 그릇을 완성한 적은 없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것들을 올려서 먹는다.      

어제는 아이가 먹고 싶다는 뼈다귀 우거지탕을 만들었다. 요즘처럼 후텁지근한 날씨에선 절대 시도해선 안 되는 것이었지만 점심시간에 잠깐 시간을 내어 기본 작업을 할 정도로 정성을 들였다. 저녁 시간에 국물 맛이 끝내준다는 찬사를 받았다. 비빔면으로 결정하고 나서는 지난 저녁이 생각나면서 내게는 왜 이런 정성스러운 마음이 미치지 못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건 아마도 십여 년을 전업주부로 살아온 몸에 밴 습관 같다. 한편으론 밥은 잘해주는 엄마가 되고 싶은 욕심이 종종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내는 듯하다. 그렇지만 이성이 나타나 시간과 만족이라는 두 가지를 적절히 조화시키고 싶을 땐 힘이 덜 들어가는 음식을 택한다. 나를 위해서 불 앞에 서고 싶지는 않다. 나를 덜 사랑하는 것일까?     


내게 미안한 생각이 들면서 비빔면에 몸에 좋은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을 넣기로 했다. 나를 거쳐 간 비빔면 최초로 토마토를 넣었다. 여기에 양파와 풋고추를 채 썰어서 고명으로 했다. 냉장고에 있던 삶은 달걀도 함께다. 냉면 그릇에 담아 들고는 텔레비전을 켜고 거실 중앙에 앉았다.     


토마토는 생각보다 훌륭했다. 비비면 특유의 자극적인 맛이 중화되면서 부드러웠다. 이 틈을 비집고 양파의 알싸함과 고추의 싱싱함이 깔끔한 맛으로 이어졌다. 양이 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디로 자취를 감췄는지 모르겠다. 


비빔면을 먹고 나니 점심시간이 막을 내렸다. 이때를 기다리며 키보드 자판을 정신없이 두드렸고, 형광펜을 들어 자료를 줄 그어가며 읽었다. 이제 무엇을 희망하며 일할지 걱정이다. 이상하게도 점심이 지나면 저녁은 그리 바라는 게 없을 때가 대부분이다. 나 혼자만의 시간은 사라지고 남편과 아이들과 부대껴야 하는 현실의 무대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내게 먹는 일은 기꺼이 즐겁지 않은 일들을 인내할 수 있는 달콤한 사탕이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겠다. 내일 점심은 뭘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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