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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Sep 13. 2022

할 수 있는 만큼만, 사과 조림

가볍게 하루를 보내기


냉장고 야채 박스를 열었더니 초록 사과가 들어온다. 정확히 언제 사 왔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을 만큼 시간이 지났다. 8월의 어느 휴일이었다는 것만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한 번 과일로 먹었고, 그다음은 주스, 마지막은 샌드위치에 올렸다. 그것이 사과를 먹은 몇 번의 기억이었다.     

매일 먹을 게 없다 하면서 실상은 달랐다. 요즘 들어선 냉장고를 채우기보다는 있는 것을 잘 먹자는 주의지만 매번 이런 일이 생긴다. 9월이 오기 전에 다 먹었어야 할 과일이었다. 이미 빨간 사과가 시장에 나왔고 초록의 아오리에는 관심이 없어졌다.    

  

냉장고 문을 닫았다가 바로 열었다. 사과 다섯 개가 있었는데 우선 두 개를 꺼냈다. 별생각 없이 씻었다. 씨와 딱딱한 부분을 칼로 도려내고는 나박김치 만들 때 무를 써는 것처럼 얇게 저몄다. 사과 두 개였는데 썰어놓으니 작은 산을 이뤘다.     


습관적으로 냄비에 그것을 모두 넣고 설탕을 적당량 뿌려두었다. 가스 불에 냄비를 올리고 중간 불에서 조리기 시작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보글보글 설탕 녹는 소리와 함께 바삭거리던 사과가 쪼그라들기 시작한다. 사과에서 나오는 수분이 더해져 국물이 만들어지고 사과에 스며든다.     

아직은 여름인 사과

연두이던 사과껍질도 갈색으로 변했다. 보는 것 자체만으로 싱그럽다 느껴지던 사과가 빛을 잃어버린 것 같아 아쉽다. 한편으론 달콤한 사과 맛을 다른 무엇과 함께 경험하고 싶다. 통밀 식빵 한 조각을 바삭하게 팬에 구운 다음 사과 조림을 올렸다. 연한 갈색 두 종류가 어울렸다. 이제 막 다가올 가을을 닮았다.


한입 베어 물었다. 달콤한 사과 시럽이 빵에 어울렸다. 사과는 아삭하면서도 부드러워졌다. 그냥 두었으면 수분이 다 빠져나가 볼품없는 사과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사과를 살려내고 싶었다. 처음 사과를 마트에서 봤을 때 계절의 변화에 놀라며 반가웠다.  


철마다 나는 여러 음식 재료를 만날 때 기분을 되뇌었다. 행복해지는 법에서 단연 으뜸인 것은 현재에 머물기다. 심리학에서나 마음 수행 전문가들의 주장 역시 이것에 모아진다. 그런데 마음은 이상한 것이어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현재보다는 다른 시간에 머물러 힘들게 한다. 그럴 때 나를 붙잡아 주는 게 먹는 일과, 그것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것의 바탕이 되는 과일과 야채는 내게 단순한 게 아니었다.     

설탕을 머금은 사과

갑작스럽게 사과 조림을 만든 것도 그런 행동의 연장이었다. 추석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몸이 지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휴일이 지나가는 게 아쉬웠다. 날씨 또한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다음날이 되니 하늘은 잔뜩 흐렸고 습도가 높다. 어느 사이에 가족과의 관계 혹은 시댁과의 여러 갈등이 스멀스멀 내 주변을 맴돈다. 그것들이 가지를 만들어 퍼져나간다. 그러다 냉장고로 발길을 돌렸다. 


몸이 피곤해지면 판단력이 흐려진다고 하는데 내가 그랬던 모양이다.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반복되는 먹을 것 찾기가 시작되었다. 냉장고 속에 무엇이 있는지 살피다 발견한 사과였다. 사과를 그냥 집어 들고 조림을 만들었다.      

가을 색 사과조림 샌드위치 

사과에 이리도 마음을 쓰면서 정작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은 무엇일까? 그저 속상하다고 푸념하는 일에 급급했고 살피는 일은 뒷전이었다. 그런 내가 사과가 말라 가는 일은 신경 쓰였다. 


사과 조림을 올린 샌드위치로 점심을 대신했다. 사과조림의 열기가 사라질 즈음 사각 작은 유리그릇에 담고는 냉장고로 직행했다. 냉장고에서 꺼낸 사과가 다시 다른 모습으로 냉장고에서 얼마 동안 머문다.

어찌 보면 내 생각들도 이렇게 반복된다. 그런 것 대부분은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하루를 가볍게 사는 건 당장 사과가 말라 가는 일을 막기 위해 조림을 만들어 먹는 것. 딱 그 정도면 족하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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