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진미 Sep 26. 2022

주인을 닮은 집밥 그곳의 밥정

한옥에서의 점심 이런저런 생각들 

한옥 마루에 긴 탁자가 놓여 있고 과일들이 놓였다. 곳곳에는 그림이 걸렸고 오래된 가구에는 도자기와 차 도구가 가득했다. 그리고 한편에는 달항아리를 연상시키는 도자기가 놓여 있다. 그동안 그려봤던 그러나 쉽게 만나기 힘든 공간이었다.      


내 눈은 커지고 기분이 좋았다. 예상에 없던 일정이어서 혼자 투덜대고 있었는데 뜻밖의 공간은 선물이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의 향기가 어렸다. 화려한 꾸밈 대신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그곳은 집주인의 성정을 미뤄 짐작하게 했다.     


잘 모르는 이들과 둘러앉아서 밥을 먹었다. 열댓 명이 되는 사람들이 큰 접시에 밥과 여러 반찬을 원하는 만큼만 덜어서 먹는 뷔페식이었다. 고구마순과 부추김치, 멸치 견과류 조림과 달걀 장조림, 풀치 조림, 버섯전과 두부전 등 모두가 집에서 먹는 것들이었다.      


점심시간에 맞춰서 방금 지은 온기 가득한 밥에 반찬들은 잘 어울렸다. 처음에 반찬을 마주한 순간 안주인의 마음이 살며시 전해왔다. 오랫동안 학문과 연구에 매진해온 이와 함께 살아온 삶의 방식이 엿보였다. 


이 집에는 언제나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주인은 경제생활과는 거리가 있었고 그의 아내는 그런 살림에서 집을 찾아온 이를 위한 정성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있는 그대로 대접하고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  특별함보다는 조금 신경 쓴 전 한 가지로 식탁을 빛나게 하는 지혜가 있었다.  작은 도자기에 이제 익어가는 듯 주황 빛깔을 보이기 시작한 땡감 가지를 꽂아 놓은 모습에는 세심함과 아름다운 식탁을 위한 배려가 머물렀다.


이 자리는 일찍부터 잘 알고 있는 이들과 나처럼 처음 만난 이가 뒤섞인 식사였다. 그런데도 모두가 한 목소리로 “밥을 먹어야 친해진다”고 했다. 그들은 ‘밥정’을 얘기했다. 사람들은 밥을 먹으며 따뜻한 밥에 고마움을 전했다. 모두가 김치가 맛있다고 했고, 멸치볶음의 비법을 묻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처음에 그곳에 발을 들였을 때 느꼈던 어색함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매일 먹는 게 밥이지만 이날처럼 반찬을 살피면서 먹었던 적이 없었다. 음식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특징들을 천천히 경험하고 싶었다. 아삭하면서 적당히 숨 죽은 고구마 순 김치는 아삭했고 깊었다. 아직도 다시 먹고 싶을 만큼 생각난다. 바싹 마른 풀치는 부담 없지만, 즐거운 맛이었다. 하루 걸러 먹는 두부는 큰 조각으로 썰어 구운 다음 양념장을 얹으니 우아했다.


노란 접시와 놋수저를 들었다. 접시는 플라스틱이었다. 이상하다 여기고 있었는데 안주인이 말한다. “이거 자연 분해되는 플라스틱이에요. 옥수수를 원료로 해서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고풍스러운 한옥에서 플라스틱은 이상하다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밥을 다 먹고 나니 과일 차례였다. 둥글고 높이가 있는 접시가 멋스러웠다. 배와 포도, 사과, 귤이 어울렸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아주 작은 꽃 하나가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익숙한 과일들이 꽃과 어울렸다.   

  

집주인은 부인이 한 번도 자신에게 돈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강단 있고 생활력 강한 안주인은 아마도 남편의 오랜 배움의 길을 이끄는 도반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스쳐 가는 인연일지도 모르는 이들과의 만남이었지만 진심을 담은 밥이 있어 오래 기억될 듯하다. 있는 그대로, 그렇지만 부족함이 없는 밥상을 준비하는 과정이 곧 밥정으로 이끄는 게 아닐까.     


그동안 우리 집을 찾은 이들에게 차려낸 밥상을 떠올렸다. 한동안은 열심히 했는데 요즘은  밖에서 먹을 때가 많다. 처음에는 기꺼이 시작했지만 준비와 마무리 과정에서 지쳐버리는 까닭에 멀리하게 되었다.  한옥에서의 한 끼를 경험하고선 생각이 바뀌었다. 있는 만큼만 상에 올리고, 손님을 위한 무언가 하나만 준비하는 일이라면 그리 어려울 일이 없을 듯하다. 다음에는 누구를 불러서 밥을 먹을까 고민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동그랑땡처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