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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Oct 02. 2022

밥의 침체기 고마운 김밥

익숙함과 끌림

    

가을 날씨로 위안을 받는다. 뜨겁다 느껴질 만큼 햇볕이 쏟아지는 날이면 집안은 서늘하지도 않고 적당한 건조함과 온도를 유지한다. 다른 사람들은 덥다고 여름이 다시 온 것이냐고 말하지만 내게는 적당한 평화다.     


계절은 그럭저럭 괜찮은 상태이지만 어쩐지 나는 자꾸 피곤함이 밀려온다. 밥하는 일에는 언제나 벌떡 일어나지만 귀찮다고 여겨질 정도다. 냉장고 문을 열어도 딱히 들어오는 재료가 없다. 계란 프라이에 간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벼 먹는 것으로 할까 하다가 다시 멈춘다.  

   

이건 아니다 싶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한 끼가 될 것은 분명하지만 내 마음은 다른 곳으로 향한다. 압력솥에 쌀을 씻고 흰밥을 짓기로 했다. 매일 그러하지만 질리지 않는 우리 집 김밥을 만들기로 마음을 바꿨다.  

   

묵은지와 달걀만 들어간 간단한 김밥. 초록보다는 점점 색이 바래갈 가을을 닮았다. 이제 두 달 정도 지나면 딱 일 년이 된 묵은지를 김치냉장고에서 꺼냈다. 국물을 좀 짜두고 채 썰어 매실청을 더해 볶는다. 다음은 달걀 차례다. 잘 풀고는 지단을 지져내고 길게 썰었다.     

익숙한 김밥

정말 후다닥 만들었다. 밥은 소리를 내더니 뜸을 들이다 어느새 조용해졌다. 뜨거운 온기가 얼마나 강렬한지 조금만 방심하면 데일 정도다. 스테인리스 볼에 밥을 적당량 덜고 참기름을 더해 버무렸다. 그런 다음 김을 펴고 돌돌 말아주었다.     


그렇게 아침 김밥이 완성되었다. 스스로 요즘 집밥의 침체기라고 불렀다. 몸이 조금이라도 피곤해지는 날은 밥하는 일을 멀리하고 싶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무엇을 해야겠다는 강한 동기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변화는 그동안의 집밥 노동의 정도를 살피게 했다. 당연하다 여기며 별 마음이 없었는데 그건 당연한 게 아니었다.   

 

그동안 절로 알아서 했던 일인데 안 하고 싶다. 지겹다고 딱 잘라 말하기도 어렵다. 몸을 그리 움직이지 않아도 라면을 먹거나 정말 있는 것으로만 먹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도, 그것 또한 불편하다. 이것도 저것도 아닐 때, 선택하는 그것조차 뒤로 미루고 싶을 땐 정말 난감하다.     


그래도 생각을 멈춰버리면 안 될 것 같다. 별것 아니 같지만 직면해야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김밥을 말았고 접시에 가득  김밥 꽃을 만들었다. 내 손을 거쳤지만 언제나 반기게 하는 맛. 그 비결이 뭔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게 하나도 없는 보통의 김밥. 혹은 너무나 소박할 정도다.      


아이와 둘러앉아 재밌고, 맛있게 먹었다. 지난주 어느 날에도 먹었는데, 아이는 또 다른 행복한 얼굴이다. 내 작은 노력이 주위를 가볍게 한다. 이럴 때 제 역할을 해주는 것, 익숙한 것들을 해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너지를 크게 써야 하는 것보다 머릿속으로 다 그려지는 것, 부담이 없는 것. 그것만으로도 조금 일어날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밥의 침체기에 김밥을 떠올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게 김밥의 숨은 매력이다. 한편으론 또 이런 끌림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한번 탐험해 보고 싶을 정도다.  

   

일상이 더해져서 만들어지는 내 삶은 익숙한 것에서 좋아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알아내는 일인 듯하다. 좋아하지만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것보다는 자신 있게 실천해 가능한 범위의 것들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많다. 이것을 성장과 발전이라는 시선으로 본다면 답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그때 좋으면 그만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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