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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Oct 05. 2022

아침부터 저녁밥

나를 부엌으로 이끄는 이유

아침에 저녁을 준비했다. 아침을 준비하던 시간과는 불과 두 시간 차이다. 어제저녁 늦게서야 다른 지역에 가야 하는 일이 생겼다. 집에서 돌아오면 저녁 10시를 훨씬 넘길 시간이었기에 식구들의 저녁밥을 미리 챙겼다. 8시면 문을 여는 동네 마트에 다녀왔다. 무슨 반찬을 만들어 놓고 가야 하나 고민하다 김치찌개로 결정했다. 일 년이 다 되어가는 묵은지는 요즘 들어 맛이 더 깊어졌고 쌀쌀해진 날씨에는 국물이 있어야 좋다. 숭덩숭덩 썬 돼지고기와 두부, 콩나물을 넣은 시원한 김치찌개를 끓였다.     


설거지를 끝냈는데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리니 이상하고 어색했다. 이리도 부지런히 움직이는 내가 신기했다. 찌개의 맛은 시간이 좌우한다. 빨리 끝내려고 하면 할수록 제맛을 내기가 힘들다. 아직은 여유가 있었기에 천천히 시간의 맛을 들였다.    

 

고기와 김치에 매실액을 한 숟가락 정도 넣고는 익혔다. 김치와 고기에서 수분이 나와 20여 분을 지나고 나서 찬물을 한 그릇 부었다. 물에 찌개 건더기가 잠겼다. 이제는 중간 불에서 40여 분 충분히 보내고 나면 된다. 절반의 시간이 지날 무렵 콩나물도 넣었다.      


김치찌개 냄새가 온 집안에 퍼져나간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리 향기롭지는 않다. 아침은 평균적으로 맑아야 좋다. 상쾌한 기분, 싸늘한 공기가 온 집안에 머물러야 정신이 깨어난다. 그런 하루의 시작을 김치의 묵은 냄새가 침범하려 하니 최대한 방어하고 싶었다.     

아침에 끓인 저녁 김치찌개

방문은 닫고 거실과 부엌이 통하는 문은  다 열어젖혔다. 그러니 찬바람이 들어와 찌개의 흔적을 조금씩 어디론가 데려가는 모양새다. 시계를 보면서 대강의 음식이 다 되어가는지를 짐작한다.      


예전에는 그냥 무턱대고 느낌만으로 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시작할 때 시간을 얼핏 살피고 나서 끝나는 시간을 염두에 두면 생각보다 맛의 균형이 유지되었다. 오랜 시간 경험이 쌓아준 감이라는 것과 객관적인 데이터를 합한 결과다.     


오후부터 시작될 일을 준비하기 위해 노트북을 켜고 여러 가지를 메모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카톡이 왔다. 오후 2시 반부터 시작되는 일정이 앞당겨졌다는 것. 11시부터라고 했다. 당황스러움이 밀려온다. 빨리 챙기고 나서야겠다고 마음먹은 찰나 다시 메시지가 왔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이들의 모습을 촬영해야 하는데 수강생들이 이날 따라 적게 올 예정이라고 했다. 결국은 원활한 촬영을 위해서 다음 주로 미뤄졌다. 순간 멍해진다. 아침 6시를 10분 남겨 둔 시간부터 일어나서 계속 움직인 그동안의 시간 값이 더해져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간다.  

    

내가 해야 할 일이니 빨리 끝내고 싶었다. 갑작스럽게 일정을 통보받은 어제는 기분이 별로였지만 계획된 일이었기에 잘 마무리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또 제동이 걸렸다.  이 모든 게 결정되기까지 난 아침에 저녁까지 준비해 두는 성실한 엄마가 되었다.     


다른 일에도 이처럼 미리 준비하고 실행해 옮기는 게 있을까 싶다. 아무리 떠올려봐도 그런 게 생각나지 않는다. 내 삶에서 가장 대충 하지 않는 부분이 가족들의 밥이었다.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일을 위해 잠시 집을 비우는 시간, 큰아이가 중학생이니 알아서 먹을 수도 있다. 집 근처에는 편의점이 있고, 반찬가게에서 몇 가지를 사 오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별로 발길이 그곳으로 향하지 않는다. 내 손을 거친 밥상이 식구들에게 좋을 것이라는 마음에서다.

      

아마도 이건 내 몸에 밴 어린 시절의 경험과 맞물려 있는 듯하다. 언제나 농사일로 바빴던 엄마는 식구를 위한 밥상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때로는 텔레비전 요리 프로그램을 보고 한 가지씩 팁을 얻어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어서 내놓았다. 엄마는 부엌에서 망설임 없이 도전하는 탐험가의 면모를 보였다.     


그 덕에 생각지도 못한 앞서가는 음식들을 맛보았다. 그런 엄마의 모습은 내게 절로 음식을 만드는 게 어렵지 않고 즐거운 일임을 알게 했다. 엄마는 무엇을 하나 만들더라도 재료의 손질 법과 잊지 말아야 할 노하우 들을 수다처럼 들려주었다. 부엌에서 밥을 준비하는 일은 부담 없는 과정으로 다가왔다.      


11시간이나 지나야 먹을 저녁밥을 준비하는 내가 한편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단지 직접 만든 것을 가족에게 내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주부라는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글을 쓰면서 그 너머에 있는 내 어린 시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지금의 나를 살핀다. 밥 하는 일은 누구를 위하는 마음 이전에 부엌에서 내가 지니게 되는 편안함과 기쁨이 있어 끌리는 것이었다. 매일 같은 재료로 할지라도 순간마다 다른 과정과 맛을 보이는 음식의 매력에 빠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부엌에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은 어떤 것도 대처할 수 없는 만족이었다.  물론 귀찮을 때도 있지만 그것을 앞서는 감정은 가슴 뿌듯함이었다. 내가 아침에 저녁을 준비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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