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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Oct 07. 2022

가을 깊은 단맛, 보늬 밤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되는 1박 2일 요리 여행

막내와 김태리 주연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즐겨본다. 다정한 온기와 신선함을 느끼고 싶을 때, 집에서 자연이 그리울 때 찾는다. 일상과 함께 연결되는 제철 먹거리는 영화의 중요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늦가을, 주인공 혜원이 한밤중에 밤을 꺼내 조림을 만든다. 영화를 보면서는 그냥 한번 먹고 싶다, 어떤 맛일까 하는 궁금증으로 스쳐 지났다.     


보늬 밤 

영화를 마지막으로 본 게 지난 늦 봄이었다.

“엄마, <리틀 포레스트에>  나온 밤 조림 먹고 싶다.”

“응, 알았어. 밤 많이 나올 때 해줄게.”

그리고는 흘려보냈다.  

“엄마, 그거 있잖아. 밤 조림 만들면 안 될까?”

며칠 전 아이가 또 그 이야기를 꺼냈다. 마침 집에는 동네 친구가 준 밤이 있었다. 

“내일 할까?”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약속이 되어 1박 2일의 여행으로 이어졌다.  밤 조림의 정확한 이름은 보늬 밤.  단단한 겉껍질만 버리고 밤의 속살을 감싸는 속껍질(보늬) 그대로 설탕에 조려내는 요리다.    


우선 단단한 껍질을 벗겨내야 한다. 10시 즈음에 밤을 적당량 물에 담갔다가 저녁 9시 즈음부터 칼을 들어 작업을 시작했다.  한 시간을 달리니 올망졸망 밤톨이 갈색 털 옷을 입은 모습이 드러났다. 처음에는 왜 이걸 하게 되었을까 하는 후회가 찾아왔지만 스테인리스 볼에 손질된 밤이 하나둘 늘어 갈수록 잊혔다.


잠자기 전 베이킹소다를 넣고 물에 담갔다. 밤의 떫은맛을 없애기 위한 첫 단계다. 꼬박 12시간이 지난 후, 다음날 다시 베이킹소다를 넣고 밤을 끓여주고 씻기를 세 번 반복했다. 진한 보라와 갈색의 중간색을 띠는 물이 냄비에 가득하다. 밤 속살을 감싸는 털과 보늬에서 나온 것이었다. 혹시나 밤의 속살이 터질까 정성스럽게 다뤘다. 그래도 역시나 몇 개는 벌써 흐물거리더니 탈락이다.   

밤의 겉면에 드리운 진한 갈색 심지 같을 것을 이쑤시개로 몇 개 떼어내었다. 이제 마지막 고지가 가까워졌다. 밤의 무게를 알기 위해 저울에 올렸다. 설탕의 양을 적당히 하기 위한 과정이다. 눈짐작으로 해도 괜찮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에 올라온 레시피를 따르기로 했다. 밤 무게의 60퍼센트 정도가 적당하다고 했다. 큰 냄비에 물과 설탕을 놓고 졸이는 마지막 과정이다. 이때 많이 저어주면 밤이 으스러질 수 있어 가능한 한 그대로 두었다. 어느 정도 졸았으면 와인과 간장 한 숟가락을 더하고 나면 알밤 색은 진해지고 빛나기 시작했다.    

  

긴 여정이었다. 몇 년간 이토록 오래 공들여 무엇을 만들었던 적은 없다. 내 손이 본격적으로 움직였던 건 서너 시간 남짓이었고, 나머지는 기다림과 살핌이었다. 밤 껍데기를 벗기면서는 오랜만에 몰입했다. 손가락 끝이 아릴 만큼이었지만 여러 생각들로 무거웠던 머리가 가벼워졌다. 다른 집안일을 해가며 시간을 확인했다.  온전한 밤 조림을 만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종일 가스 불 앞에서 서성였던 탓에 갑자기 밀려오는 피곤함은 밤 조림이 다 되어간다는 신호였다.   

   

보늬 밤은 그렇게 해서 작은 병 두 개와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유리 보관함에 담겼다. 그동안의 흔적을 말해주듯 싱크대에는 설거지가 가득했다. 이 요리는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에서 출발했다. 먹고 싶다는 아이의 희망을 들어주면서도 안 가본 길을 가고 싶은 욕구가 서로 맞물려 가능한 일이었다.    

  

영화 속에서 밤 조림을 만드는 과정은 부엌 속 잔잔한 가을밤 풍경이었다. 내가 경험한 현장은 부지런함과 인내, 관심, 여유로움을 소환해야 했다.  진한 검 갈색인 그것을 조심스럽게 들어 입안에 넣었다. 아직은 맛이 겉도는 듯했지만 보통의 달콤함과는 달랐다. 밤 향이 살짝 머물러 부드러웠고, 잘 어루만져진 깊은 달달함이었다. 조용한 오후에 병 속 그것을 하나 꺼내어 커피 혹은 홍차와 먹으면 가을이 완성될 것만 같다.   


보늬 밤은 겨울을 향하고 있지만, 마지막 결실을 위해 온갖 에너지를 쏟아부은 가을의 열정과 닮았다. 여기에 가을의 기다림이 더해졌다. 가을의 일은 마음이 급하다고 서두를 수 없는 일. 과일이든 곡식이든 제 때가 되어야 거둬들일 수 있다. 밤 조림도 단숨에 끝내기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계단을 오르듯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나 꺼내 먹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제 맛이 들 때까지 외면하는 무심함도 필요하다. 한두 달은 지나야 충분히 맛 든다는데 그때까지 남아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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