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 연가(戀歌)

평범한 듯 특별한 최고의 음식

by 오진미


김밥을 사랑한다. 허둥대며 만원 지하철에 몸을 맡기던 출근길, 회사 지하 통로에는 항상 김밥 판매대가 있었다. 단돈 천 원이다. 매일 아침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정성 들여 말았다는 삐뚤 배뚤 매직으로 쓴 문구가 아직도 기억난다. 은박지로 포장된 김밥을 먹는 그때는 정신없는 하루 중 아주 잠깐 숨통 트이게 하는 순간이었다.


편의점 김밥도 빼놓을 수 없다. 십여 년 전 천 원 김밥이 있었다. 이른 아침 조용한 명동거리, 회사로 올라가는 모퉁이 편의점을 일주일에 두세 번은 들렸다. 카드 계산도 번거로워 집에서 천 원을 호주머니에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그것을 골랐다. 전자레인지에 30초 데운 후 후다닥 사무실에 올라가서 고개를 푹 숙이고 먹는다. 가끔 특유의 냄새가 신경 쓰였지만 창문을 활짝 열고 부지런히 열심히 먹었다. 아침 스트레스를 날려주던 잠깐의 위로였다.


워킹맘이던 시절 김밥은 바쁜 하루 허기를 채워주는 고마운 음식이었다. 이때만 해도 집에서 김밥을 싸지 않았다. 먹을 사람도 마땅히 없었을 뿐만 아니라 쉬는 날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가끔 생각나면 가게에서 사 먹는 게 전부였다. 이제 상황은 바뀌어 꼭 내 손으로 해 먹는 최고의 음식이다. 김밥을 먹을 때면 누구도 내 솜씨를 따라올 수 없다고 자화자찬한다.


휴일 아침이나 점심은 김밥처럼 만만한 게 없다. 내 맘대로, 집에 있는 것들을 챙겨 넣으면 끝이다. 힘을 뺀 음식이다. 어떠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대신 원하는 것을 잘 정리해서 밥 위에 가지런히 놓아주면 된다. 그동안 생각했던 단무지, 햄, 맛살, 오이, 계란 등 익숙한 재료는 잊은 지 오래다. 김만 있으면 된다.


달콤하고 짭짤한 유부를 품은 김밥이 요즘 내 맘에 콕 박혔다. 김밥이면 무엇이든 괜찮다고 외치지만 언제부턴가 유부 없는 김밥은 팥 없는 팥빙수다. 냉동 유부를 채 썰어 뜨거운 물에 데쳐내고 차가운 물에서 한 번 더 기름기를 빼준다. 여기에 간장과 매실청, 요리술, 올리고당을 살짝 넣고 조려주면 김밥에 날개를 달아주는 재료 탄생이다. 지단도 궁합이 잘 맞는다. 계란을 풀어서 참기름과 소금을 조금 넣고 팬에 풀어놓은 다음 익으면 채 썰어 준다. 엄마가 몇 달 전에 보내준 열무김치가 냉장고 속 어디에 틀어박혀 있었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시큼한 맛이다. 흐르는 물에 잘 씻은 다음 매실청을 넣고 기름 두른 팬에 볶았다.


‘시골의 오후’, 일요일 점심으로 결정된 김밥에 이름을 붙였다. 무엇이든 이름을 갖게 되면 특별해진다. 햇빛 쨍쨍한 날 감도는 환하고 밝은 발랄함은 없지만 조용하고 빛바랜 색이 마음을 가지런히 모아준다. 네 식구를 위한 김밥 다섯 줄이 완성되었다. 아이들은 마을을 떠난 지 오래고 나이 든 어르신들이 마을을 일구고 있는 외딴 시골 마을의 풍경 같은 김밥이다. 어딘지 쓸쓸해 보이지만 따뜻함이 묻어 나는 맛이다.

김밥 말기 20여 년의 베테랑이다. 내가 기억하는 첫 김밥은 고등학교 1학년 봄 소풍 때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와 함께 점심 준비를 했다. 소풍날은 법칙처럼 김밥이 주인공이다. 친구와 자취방에서 함께 만들기로 했다. 재료를 준비하고 김밥 싸던 엄마의 모습을 되살렸다.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하려는데 난리다. 김을 맨 아래에 깔고 흰 밥을 올린 다음 여러 가지를 차곡히 쌓았다. 그다음이 문제다. 돌돌 마는 과정에서 김밥은 속이 터지고 듬성듬성 제멋대로다.

“우리 오늘 도시락 망했다. 어떡하지. 이거 가져가기 너무 창피한데.”

“그러게 어쩔 수 없어. 그냥 억지로라도 대충 싸고 가자. 다른 것도 없잖아.”

도시락 하나에는 두 줄 반 정도가 필요했다. 급한 대로 손으로 헝클어진 모양을 잡아가며 겨우 도시락을 만들었다. 금세 풀릴 것 같은 고무줄을 엉성한 손으로 억지로 동여맨 꼴이었다.


첫 소풍의 설레던 마음도 김밥 때문에 우울해졌다. 이날의 하이라이트인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둘러앉아 먹을 것인데 도시락 열기가 싫었다. 단체 오락이 끝나고 드디어 피할 수 없는 시간이 왔다. 친구 서넛이 풀밭에 둘러앉았다. 방울토마토까지 얹어 놓은 그림 같은 도시락을 내미는 친구와 다들 맛있는 것들을 준비해왔다. 조심조심 도시락을 꺼냈다. 다행히 김밥은 아슬아슬하게 제 모습을 지탱하고 있었다.

“김밥 네가 한 거야? 엄마가 왔다 갔어?”

“아니 내가 친구랑 만들었어. 김밥이 어렵더라고. 생각보다 잘 안되더라고.”

“아니야. 너 그래도 굉장하다. 처음 만든 거잖아.


처음은 완벽하지 않아서 기억되는 법이다. 내게 김밥도 그러했다. 좀 엉성한 모양이면 어떠랴. 아이의 손으로 부담의 무게를 안고 말았을 김밥이었다. 김밥은 무엇이든지 김과 하얀 밥으로 포근히 감싸 안아주며 독특한 하모니를 이룬다. 누구나 좋아하는 평범한 듯하지만 특별한 맛이다. 묘한 매력을 가졌다. 밥하는 일이 지겨워질 때,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오르지 않을 때 만만한 김밥에 노크한다. 언제나 기대 이상의 선택이었다. 일요일 점심도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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