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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Jan 18. 2023

따뜻한 굴 이야기

그때 굴, 지금 굴

어느 날의 일들이 지금도 그려질 만큼 생생하다면 추억이 차곡차곡 쌓였다는 의미다. 과거의 어느 한때를 종종 떠올린다. 그건 지금은 닿을 수 없는 시간일 때가 대부분이다.  그중에서 여행이나 맛있는 음식을 먹었던 일은 다른 경험들을 뒤로한다. 한겨울이면 잊지 않고 찾아오는 어린 시절에 어느 날이 있다. 가까운 친척들이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모여 살았다. 80년대 중반, 친척들의 결혼식 풍경은 여러 가지 음식으로 머릿속에 남았다.   

   

내게는 삼촌이나 고모로 불리는 이들이 짝을 찾아 나설 때만 해도 집안에서 잔치를 벌였다. 몇 날 며칠을 동네 이웃들이 모두 한 집에 모여 음식을 장만했다. 귤 수확이 끝난 농한기였다. 설이 다가올 무렵이었는데 큰할아버지 딸의 결혼식이 있었다. 날씨는 매섭게 추웠다. 그때 뽀얀 국물의 굴국을 처음 만났다. 


초등학생이던 난 굴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잔칫날 손님상에 오른 미역을 넣고 끓인 굴국은 달랐다. 우윳빛깔의 국물은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웠고, 차가운 바람은 굴이 품은 바다향과 어울려 먹을수록 여운을 남겼다. 스테인 레이스 국그릇에 담긴 국은 얼어붙은 손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그건 단지 맛으로 그려지는 한 그릇의 음식으로 끝나지 않았다. 찬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걷어붙여 음식을 준비했던 이웃들의 마음이었다. 이날은 동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쉼 없이 이어졌다.     


국을 끓이고 여러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은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들과의 조우였고, 활발한 의견이 오가는 시끌벅적하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밝았다. 여기저기서 ‘하하하’ 하는 박장대소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히는 옆집 아저씨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우렁찼다.      


아련해져서 그립고 아름다운 날들이었다. 매해 겨울이 되면 그때를 떠올리며 굴을 산다. 남편이 좋아한다는 이유와 더불어 잔칫날 굴국에 대한 기억이 살아나기에 마음이 간다. 비닐봉지에 바닷물이 적당히 담긴 채 포장된 굴은 음식 재료 이전에 옛 감성을 가슴속에서 살아 숨 쉬게 한다.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날의 굴이 더 맛나다. 우리 집 굴 요리는 초고추장에 찍어 먹거나 굴국, 굴전, 굴 무침 정도로 구분된다. 아침부터 굴전을 만들었다. 어제저녁에는 굴국을 끓였다. 싱싱할 때 빨리 먹는 게 맛을 잘 느끼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조금 비릿한 듯했지만 먹다 보니 부드럽고 고소하면서도 깊은 맛에 반했다.

     

요즘은 청양고추와 빨강 파프리카를 넣은 화사한 굴전을 좋아한다. 고추의 매운맛은 느끼하게 느껴질 수 있는 특유의 굴 냄새를 없애준다. 파프리카는 단조로운 굴전 대신 보는 즐거움을 주고 식욕을 자극한다. 

아침 굴전

어떤 요리든 자주 해 볼수록 시간이 절약되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번거롭다 느껴질 수 있는 굴전 역시 아침에 계란프라이 하는 것처럼 간단하게 할 만큼 익숙하다. 아기 볼처럼 오동통한 흰 굴은 밀가루와 달걀 물을 입혀 기름에 부쳐내는 동안 부풀어 오른다. 

     

달걀이 노란색으로 갈색으로 변해가는 첫 단계에서 뒤집고 잠시 구워주면 완성이다. 본연의 색은 감춰져 있어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지만 따뜻한 전을 하나 집어 들어 입에 넣으면 단단한 미더덕이 입안에서 팡 터지듯 굴 속살이 찰나에 내게 다가온다. 


굴국을 끓이면  처음 경험하던 그때와 비슷한 색을 만난다. 단지 함께하는 이가 우리 가족으로 한정될 뿐이다. 그때처럼 사람들과 어울리며 정을 나누던 자리는 만나기 힘들다. 이제는 남편과 굴을 나눈다. 앞으로 저장될 굴과의 시간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 벌써부터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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