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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Feb 14. 2023

고사리 이야기

지난봄 고사리를 식탁에 올리며

며칠 전에 고사리를 넣은 육개장과 나물을 만들었다. 설에 차례를 지내며 고사리나물을 만들어 상에도 올리고 먹기도 했다. 내가 직접 고사리를 삶고 음식을 만든 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니 참 오래되었다.     


비닐에 담긴 고사리를 꺼내는데 바스락 소리가 요란하다. 그만큼 고사리가 햇볕에 잘 말랐다는 의미다. 한 움큼을 덜어내었다가 모자란 듯해서 다시 조금 꺼내 물에 담갔다. 고사리에 물이 스며들 즈음에 끓는 물에 넣었다.

  

첫 물은 따라서 버리고 다시 깨끗한 물을 놓고 삶기 시작했다. 바짝 마른 가시 마냥 날카롭던 것이 서서히 부드러워진다. 조금씩 물을 먹더니 제법 통통한 상태로 변했다. 그동안 숨죽여 있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양이다.


제주도 스타일 고사리나물을 만들었다. 삶아서 몇 번을 물에 담갔던 것을 채에 담아 물기를 빼고 냄비에 놓는다. 집 간장을 조금 고사리에 더한 다음 약한 불에 조리다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참기름과 참깨를 넣고 잘 저어준다. 조금의 감칠맛을 위해서 참치액을 아주 조금만 넣었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먹었던 고사리의 진짜 맛은 천천히 기다려 양념이 스며들게 하는 것. 섬의 담백한 생활모습이었다. 

고향 봄날의 기억, 고사리나물

얼마 전까지 당연하다 여기던 과정이 다시 보였다. 짙은 검정과 갈색 중간 정도의 색을 띤 마른 그것을 보면 혹독한 겨울을 마주하는 것 같다. 칼바람과 세상의 걸음을 멈출 만큼 쉼 없이 내렸던 12월 중순의 엄청난 눈사태도 떠오른다.     


밖에 나가는 일도 주저할 만큼 주위를 덮어 버린 찬 기운은 생명을 떠올리기 어렵다. 그저 숨죽인다. 시간이 흘러 봄기운이 다가올 무렵이면 이제 모든 게 살아나겠구나 하는 어렴풋함이 나를 맴도는 바람결이 전한다.     


고사리는 봄날 축축한 봄비가 쉼 없이 내리는 며칠 동안 쑥쑥 자란다. 깊은 숲 속 그늘진 어느 한 귀퉁이에서 자신만의 축제를 연다. 그들은 가시덤불이 있어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기 어렵거나, 드넓은 초원에서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어 봄을 맞이한다.    

 

그때 사람들의 눈에 띄면 얼마 동안의 행복을 마감한다. 고사리를 꺾지 않고 그대로 두면 잎이 무성한 고사리 식물이 되지만 사람들 품에 안긴 그건 뜨거운 물에 데친 다음 햇볕에 말린 후에 보관되어 오랫동안 누구의 식탁에 오른다.   

  

고사리의 입장에서 어느 것이 좋다고 해야 할지는 판단이 어렵다. 내 앞에 있는 고사리는 엄마의 수고로움의 결과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봄이 시작될 무렵, 어둠이 물러가는 새벽이면 고사리를 꺾으러 산으로 달려간다. 그때 몇 시간 동안 쉼 없이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서 거둔 것들이었다.     


단지 음식을 위해 꺼 내놓은 고사리를 앞에 두고 여러 생각이 오갔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지난봄, 고향 어느 오름 주변의 풍경이 그려졌다. 사람들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고사리 시절이 다가오면 아침이 빨라진다.     


동틀 무렵부터 점심 이전까지 얼른 고사리를 꺾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과수원 일을 하러 간다. 종일 고사리를 꺾는 때도 있지만 그건 여간 에너지가 필요한 게 아니다. 그렇기에 짧은 시간 안에 전력투구해서 고사리에 집중하고 나서는 일상의 일을 한다.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어른들에게 고사리를 마련하는 며칠의 수고로움은  한 해 동안 몇 번의 의례를 위한 준비 과정이다. 어떤 이는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 이들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시장에서 얼마를 주고 살 수도 있지만 직접 들판을 누비며 하나씩 채워간 그것이 마음이 더 가득 담긴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내게 엄마의 고사리는 어떤 것일까?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함축된다. 좋은 음식을 먹고, 하루를 무탈하게 보냈으면 하는  엄마의 기도다. 한편으론 항상 더 주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 앞에서 할 수 있는 것만큼은 꼭 해준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일터다.  

이야기를 꼭꼭 안고 있는 바짝 마른 지난해 고사리 

제주의 고사리는 다른 어느 곳보다도 맛있다. 내가 다른 지역의 것을 맛보지는 못했지만 주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다. 섬의 날씨는 험상궂고 변덕이 심해 삶의 끝없는 도전을 요구한다.      


그 틈에서 태어나고 자란 고사리 역시 부드럽지만 강한 성질을 지녔을 거다. 그것을 끓는 물에 삼고 햇볕에 널어 습기가 날아간 바싹 마른 고사리는 얼마 동안이나 변하지 않는 맛을 자랑한다.     


한 해를 보내고 다시 봄이 돌아올 즈음에도 그 상태 그대로 유지된다. 이제 한 달 정도가 지나면 다시 고사리를 만날 시절이다. 그럼에도 꼿꼿한 작년 고사리는 여러 번의 손길을 거친 결과다. 고사리를 통해서 바라보게 되는 풍경 또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 중 하나가 아닐까. 고사리가 태어나고 사람이 거둬들이고 식탁에 오르는 모든 과정이 그렇다.      


엄마의 고사리를 보며 다른 때와는 다른 진한 감사함이 있다. 요즘 들어 엄마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바람처럼 날려 버리는 말이었지만 어느 날부터 달리 들린다. 바짝 마른 한 줌의 고사리를 물에 불려 놓으면 작은 스테인리스 볼에 가득 찰 정도로 불어난다. 어느 것 하나 헛됨 없이 차곡차곡 쌓아 올린 우리네 삶과 닮았다. 그 속에 엄마도 있다. 고사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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