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진미 Feb 17. 2023

도토리묵

할머니의 삶이 스치다 

날이 흐리다. 봄이 오는 것 같은데 아직 손발이 차가운 걸 보니 좀 기다려야 하나 보다. 해야 할 일이 많을수록 다른 곳을 기웃거린다. 이럴 땐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들에 몸과 마음이 움직인다. 식물과 음식으로 향한 금요일이다.


김에 밥을 싸 먹듯 쉽게 할 수 있고 부담이 없는 것이 일 순위다. 며칠 전에 한의원에 들렀다 마트에서 봤던 수선화 화분이 집에 와서도 아른거렸다.  하루를 쉰 다음날 다시 한의원 치료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그것을 샀다. 그러고는 뭘 할까 고민하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언제부터 떠오른 도토리가루를 찾았다. 병에 담아 둔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인다.     


맨 위쪽 선반에 숨어 있다. 어느 늦가을 아버지 제사에서 이모가 들고 왔던 것. 시골에서 할머니, 이모의 시어머니께서 도토리를 주워서 만들었다며 나눠주었다. 누구에게나 세월의 무게는 무거운 법이다. 손이 야무지고 깔끔한 어르신이었지만 나이가 들어 힘이 들다 보니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그중에 하나가 먹거리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이모는 도토리가루가 곱지 않아서 곱게 채를 쳐서 다시 사용하라고 했다.     

 

그저 받아 들고는 냉장고에 두었다. 그것이 한 십여 일 전부터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마다 조만간 묵을 만들 때가 오겠구나 했는데 그날이 오늘이었다. 머리보다 손이 빨리 움직였다.  가루는 고운 것보다는 덩어리 진 게 대부분이다. 마늘 찢는 절구에 넣어서 다시 몇 번을 쿵쿵 힘을 주어서 가루로 만들었다. 이만하면 됐다는 마음이 들 즈음에 그릇에 물을 부어 잘 섞어준 다음 떫은맛을 없애기로 했다.  이모가 서너 번을 물에 담가야 부드러운 맛이 될 것이라며 신신당부한 까닭이다. 아침부터 시작해서 점심을 먹은 후에야 본격적인 묵 만들기에 들어갔다. 가루와 물의 비율을 1대 6 정도가 적당하다는 동네 언니의 말이 생각나서 그대로 따랐다. 


한 일 년 전에 만들고 두 번째다. 가루를 넣은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니 조금씩 묵직한 느낌이 감돈다.  묵의 성공 가능성에 갸우뚱하고 있을 때 그나마 나를 안심시키는 징조였다. 확실하진 않지만 느낌으로 그만해도 됐다 싶을 때 빵틀에 부어 식혔다. 물이 많아서 묵이 조금 묽은  것 같아 신경이 쓰인다. 그럼에도 별다른 생각이 떠다니지 않고 힘을 주고 묵을 저을 때가 즐거웠다.

도토리묵

묵보다 더 마음이 갔던 건,  도토리가루를 만든 할머니였다. 내가 그분을 만났던 건 칠순 잔치가 있던 10여 년 전 늦가을이었다. 잔치는 경기도 평택의 어느 예식홀에서 열렸다.  잠깐 인사를 나눌 때 마주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선명하지 않은 기억을 따라가 보면  햇볕에 검게 그을린 얼굴, 곧게 피는 게 어려울 만큼 굳어진 허리가 어르신의 그동안의 삶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모는 시댁 얘기가 나오면 언제나 동네에서 시어머니만큼 열심히 사는 분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제사 때마다 시루떡을 집에서 만들어 상에 올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온 가족을 불러 모으는 김장에도 혼자서 사 남매의 김치를 준비할 정도로 몸을 아끼지 않았다. 비 오는 궂은날에도 논밭으로 가는 일에 주저함이 없고, 집에서도 쉼 없이 움직이는 부지런한 어머니였다. 이런 어르신의 발걸음이 쌓여 내 곁으로 온 도토리가루였다. 도토리를 주웠던 가을은 농촌에서는 가을걷이로 일 년 중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낸다. 점심밥을 해 먹는 일조차 사치처럼 느껴질 만큼 땅에 얼굴을 묻고 하루를 보낸다. 할머니에게 그런 정신없는 때에 도토리를 줍는 시간이 허락되었을까 싶다.      


내게 온 도토리가루는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진심과 성실히 살아온 어르신의 일상 여정이 담겼다. 묵을 쑤어보면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작은 양으로 시작했지만, 생각보다 불어난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어린 시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사랑이었음을 가슴으로 알게 되니 말이다. 계절이 주는 선물을 받아서 생활에 활용하는 어르신의 고운 성정이 따뜻하게 전해온다. 가끔 음식을 통해 타인의 일상을 돌아보게 될 때는 절로 숙연해진다. 그래서 더 탱탱한 도토리묵으로 우리 식구들을 기쁘게 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어느 가을날 도토리나무 아래를 열심히 오간 할머니의 발걸음에 보답하는 길일 테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허전해서 배추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