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 안 스티로폼 테러를 목격한 날
꼬마 열매가 맺혔다. 온 힘을 다해 기운 내려고 애쓴다. 5년 전쯤 우리 집으로 왔다. 위층 사는 엄마가 화분을 키울 자신이 없다고 준 것인데 빨간 열매가 가득한 산호수였다. 항아리만큼 큰 둥근 화분에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적당한 물과 햇빛 언제나 그러하지만 식물 키우기의 정석을 나름 실천했다. 한 해 두 해 그렇게 보내다 어느 날부턴가 잎 색이 변하면서 활기를 잃었다. 괜찮아지겠지 생각하고 무심코 지나쳤지만 좋아질 기미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초록 잎보다는 누렇게 바래거나 갈색으로 변했다. 흙이 영양분을 다했나 싶어 새로운 것으로 덮어주었고 식물 영양제를 주어도 별 소용이 없었다. 원인을 찾아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이었다. 베란다에 신문지를 넓게 펴 놓고 화분을 엎었다. 분갈이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앞에 펼쳐진 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하는 분노가 올라올 만큼 충격적이었다.
화분 안이 그야말로 쓰레기통이었다. 스티로폼 조각을 흙 대신으로 채워놓았다. 흙이라고 여길 만한 건 아주 조금이었다. 그동안 살아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얀 스티로폼을 긁어내도 끊임없이 나왔다. 큰 것에서부터 작은 알맹이까지 봉지 하나를 꽉 채웠다. 식물이 자라지 못하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사람이 땅을 딛고 살아가듯 식물 역시 흙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하는 일인데 그동안 이것이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기가 막혔다. 어느 화원에서 축하 선물로 보냈던 화분이었다. 아무리 흙에 들어가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매일 꽃과 나무를 가꾸며 혜택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테러였다.
동시에 미안해졌다. 그동안 좀 더 적극적으로 분갈이를 생각하지 않은 나 자신을 탓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식물은 흙에다 심는 거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보이는 게 괜찮으니 당연히 무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꽃집 주인에게 퍼 붇고 싶었다.
다시 새 흙으로 심었다. 작은 뿌리들이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이제부터 잘 자랐으면 좋겠다고 인사했다. 일 년이 다 돼 간다. 조금 초록빛을 내고 크고는 있지만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인지 잘 자라지 않는다. 너무 빽빽해서 가지를 정리해도 그리 신통치 않다.
아침부터 부산을 떨어 식물들에게 물을 주었다. 조금은 키가 큰 듯한 산호수를 마주했다. 사람들의 극한 이기심에 큰 상처를 입은 아이다. 이런 일이 비단 식물만의 일은 아닐 터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자주 한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의심할 때가 많다. 혹시나 피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시작된 일인 듯싶다.
모든 것에 기본을 좋아한다. 군더더기 없이 본래의 목적에 맞게 만들어진 도구나 제품에 믿음이 간다. 여러 가지를 더하다 보면 본래 의미 대신 다른 무엇이 자리 잡게 된다. 취향에 따른 선택의 문제이니 누구에게 강요할 것은 아니다. 산호수 화분처럼 꽃을 파는 사람은 화분 안에서 식물이 잘 자라도록 마음을 써야 할 일이었다. 진심까지는 아니어도 흙에 뿌리를 내리도록 하는 게 그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모르는 사람을 탓하는 일이 불편해진다. 만나서 조분조분 얘기를 들어보면 나름의 사정을 이해할 수도 있지만 내게 그런 큰마음은 없다. 한편으로는 내가 타인에게 이런 꽃집 주인 같은 사람이 됐던 적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나와 함께 하는 식물들이 목마르지 않게 살피는 일부터 해야겠다. 베란다에 둥지를 튼 친구들 몇몇은 내게 말하고 싶은 게 많을 거다. 누군가를 지적하기 전에 나를 돌아보기가 우선이다. 그럼에도 산호수 화분의 경험은 가슴이 아프다. 식물에게 편안히 뿌리내릴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기분 좋게 해 주는, 나를 위로해 주는 대상이기 전에 생명으로서 존중해줘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