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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Aug 14. 2023

나만 아는 오이냉국

한여름 과수원 점심 추억

아침 일찍 엄마와 집을 나섰다. 햇볕이 본격적으로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면 힘든 시간이 돌아온다. 이를 피해 일찍 그리고 오후 늦게 일하기라는 공식이 적용되는 여름이다.     


아버지는 경험을 중요시했다. 세상살이에 필요한 무엇이든 배워야 한다는 주의다. 그것도 가능한 어릴 때 해봐야 어른이 돼서도 할 수 있다고 여겼다.     

 

부모님은 과수원 농사를 업으로 했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에 엄마와 과수원에 김을 매러 갔다. 시간 날 때 해봐야 한다는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시작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비비고 대충 밥을 먹고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과수원에 갔다. 시골에서 자랐지만 일에는 요령이 없다. 엄마를 따라서 호미를 들고 일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슬슬 하기가 싫다.     

 

엄마에게 좀 쉬자고 졸랐다. 엄마는 지금이 아니면 더워서 할 수 없다며 부지런히 움직일 뿐이다. 그러다 얼마가 지났을까 엄마가 점심을 먹자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과수원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나를 달래려는 이른 점심이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찬은 삶은 달걀 몇 개와 열무김치와 쌈장이 전부였다. 엄마는 잠깐 어디를 다녀오더니 오이 한 개를 꺼냈다. 과수원 빈터에 여러 채소를 심어서 먹었다. 아마 오이가 자라는 곳으로 다녀왔던 모양이다. 

한여름 오이냉국 

숟가락으로 오이를 조각내었다. 엉뚱하게 이런저런 모양으로 썰린 오이는 우스웠지만 풀과 까만 흙, 작은 돌멩이, 앙상한 가지가 나뒹구는 과수원 풍경과 어울렸다. 스테인리스 국그릇에 오이를 담고 쌈장 몇 숟가락을 툭툭 넣더니 물을 부었다.    

 

숟가락으로 휘휘 저으니 오이냉국이 완성되었다. 좀 특별한 반찬이라도 있기를 바라던 내게는 실망이었다. 

“여름에 이만한 게 없다. 한번 먹어봐 얼마나 맛있는데.”

엄마의 반강요에 한 숟가락을 떴다. 집에서 종종 맛봤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고소하고 시원한 짠맛이 밥을 당긴다. 투박한 오이 조각은 아삭한 리듬을 더한다. 그렇게 밥을 생각보다 맛나게 먹었다. 하늘로 뻗어 나간 삼나무 아래 대충 마대를 깔고 먹었던 냉국은 이전과 구별될 만큼 각인되었다.     

남편이 퇴근한다는 연락이 왔다. 얼마나 더운지 밥 준비하는 일이 버겁다. 냉장고 문을 열어 보았지만 별 찬거리가 없다. 오이 하나만 덩그러니 보인다. 갑자기 냉국이 떠올랐다.     


오이와 양파, 오이고추를 채 썰었다. 그 옛날 엄마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 했다. 며칠 전 만들어둔 쌈장을 넣고 식초만 더했다. 차가운 물을 적당히 부어주고는 잘 저었다. 깨를 조금 뿌리니 끝이다.   

  

“그래, 이 맛이야.”

맛을 조금 보고 나니 삼십여 년 전 과수원 그늘에서 먹던 그 냉국이 떠올랐다. 집으로 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아이는 힘들었다. 그때 냉국은 어른들의 음식이라 여겼는데 내게 휴식을 주었다.       


얼음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속을 시원하게 해 주었고 된장의 고소함은 은근히 끌렸다. 별말 없이 속상함을 받아주었던 엄마도 스친다. 감물들인 엄마 옷에서 나는 흙냄새에 뒤섞인 살 냄새가 그래도 좋았다.      

 

오랜만에 냉국을 마주한 남편은 놀란다. 한 숟가락 맛을 보더니 표정이 좋다. 이런 날에는 이만하게 없다며 종종 먹자는 말까지 남긴다. 


“이 냉국 엄마랑 어릴 때 과수원에서 먹던 거였어.”

남편은 내 말을 듣고 그랬냐는 짧은 답만 돌아왔다. 그때를 함께 하지 않았으니 별느낌이 없는 건 당연하다.     

이제는 엄마와 그런 시간을 보낼 일이 거의 없다. 그래도 여름 어느 날 오이냉국을 만들 때면 과수원 점심 한때가 다시 생생히 살아날 듯하다. 여름이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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