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파를 다듬으며 얻은 행복한 순간
선선한 바람과 햇살이 마음에 드는 날이다. 마음에선 잔잔한 전쟁이 일어난다. 머릿속 생각들이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 주위를 맴돈다. 이런 때에 제격인 일은 무엇인가 마음을 두고 빠져보는 일이다. 김치냉장고 옆에는 내가 해결해야 할 숙제가 검정 비닐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내 손을 거치지 않고서는 세상에 나오기 힘든 녀석이다.
베란다에 벌러덩 앉았다. 가장 편한 자세다. 좋아하는 안드레아 보첼리 음악까지 틀었다. 신문지를 깔고 뿌리를 댕강 자른 다음 누렇게 변해버린 잎들이며 먹을 수 없는 부분들을 정리해 갔다. 쪽파 다듬기다.
어제 오후였다. 완도에 사는 언니가 몇 달 만에 집에 들렀다. 농사지은 나물과 부추며 쪽파를 들고 왔다. 받는 순간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 내 일이 늘었구나 하는 생각에 살짝 부담스러웠다. 지난밤에 정리해야 할 일을 미루다 오늘에서야 팔을 걷어붙였다.
파를 다듬는 일을 몰입에 비유하는 게 적당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난 오랜만에 내 앞에 놓인 파를 두고 가장 먹기 좋은 상태로 만드는 일에 열중했다. 가끔 음악 소리가 들어오기도 했지만 그야말로 흘러가는 소리일 뿐이다. 한 10여 분이 흘렀을까. 어수선했던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 되었다.
40여 분 동안 계속된 이 상태는 묘한 행복감을 전해주었다. 간단하고 단순 반복적인 일이 상담 선생님을 만나고 난 후 찾아오는 여유처럼 느껴졌다. 이 순간을 ‘몰입’이라는 단어를 감히 써보려 한다. 주부의 일이 이토록 새롭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이 참으로 오랜만이다.
타라 브랙의 ‘받아들임’이라는 책을 몇 년 만에 다시 읽고 있다. 내가 어찌할 수 없이 생기는 일들과 그 속에서 찾아오는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이런 내게 조언해줄 것을 찾다가 책꽂이에서 먼지가 쌓여가는 책이 눈에 띄었다. 며칠을 뭔가에 홀린 듯 열심히 읽었다. 상황을 바라보고 멈추고 인지하며 명상에 대한 여러 가지 얘기가 작가의 경험과 함께 녹아나는 책이다. 결코 단숨에 읽을 수 없다. 마음과 몸으로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해결 가능한 문제들이었다.
작가는 하루 중 문득문득 멈춰서 현재 바라보기를 연습하라고 했다. 그것이 삶을 새롭게 한다고 했다. 설거지를 하다가 빨래를 개다가 화라는 녀석이 힘을 얻으려는 순간 타라 브랙의 말이 떠오를 때가 있다. 나를 보기로 한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지만 말이다. 순간 멈칫하듯이 나를 거울을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살핀다. 신기하게도 나를 둘러싼 안개들이 조금씩 걷히고 단순해지고 명료해진다. 불편한 감정 자체로 존재할 뿐 어떤 무게를 갖지 않고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파를 다듬는 순간에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파김치를 하기 위해 이 일을 하는 거야 하고 마음속으로 얘기했다. 그러면서 집중했다. 예전 같으면 갑자기 밀려오는 짜증에 힘들어했을 상황이 오히려 즐거워졌다. 금세 양푼이 가득 말끔해진 파가 수북이 쌓였다. 머리도 맑아졌다.
갈등했던 여러 가지가 일렬로 줄 세워놓은 듯 정리가 됐다. 어떠한 감정이 입혀지지 않으니 아이들과 대화도 편하다. 상황을 보고 평가를 하지 않으면 마음이 들썩일 일이 없다.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멈추는 일이 항상 어려운 나였다. 감정의 원인을 솔직하게 바라보는 상황까지는 달려가지만 거기서 멈춰 버린다. 균형을 유지하는 일에선 길을 찾지 못할 때가 많았다.
요즘 들어 현재에 머무는 나를 발견하며 찰나의 기쁨을 경험하는 듯하다. 이런 일이 자꾸 쌓이다 보면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를 마주하게 되지 않을까. 가을 햇살을 먼발치서 바라보며 양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