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차를 만들며 생각하기

오롯이 나를 위한 일

by 오진미



따뜻하게 느껴지는 가을 햇살을 닮았다. 얇게 편으로 썰어 널어놓으니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뿌듯할 정도다. 생강 한 봉지를 편으로 썰고 살짝 말렸다. 점점 차가워지는 바람에 나를 보호해줄 소중한 먹거리다. 어릴 적 생강차는 맵고 부담스러웠는데 어른이 되니 언제나 두고 싶어 지는 소중한 것이 되었다. 그만큼 흘러버린 세월과 변해가는 내 몸을 바라본다.


황토 흙이 드문드문 묻었다. 흐르는 물에 몇 번이고 씻어냈다. 작년에 담은 생강차가 빈 병으로 남은 지 오래다. 생강차를 준비해야겠다고 마음먹던 차에 마트에서 우연히 햇생강을 발견했다. 10월은 돼야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반가웠다. 튼실해 보이는 한 봉지를 샀다. 시판되는 생강차를 살 마음이었는데 생강을 보는 순간 마음이 변했다. 내 손으로 만든 게 좋다는 고집이 발동했다.

여린 껍질을 칼로 적당히 다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로 얇게 썰었다. 아삭하고 소리 날 정도로 싱싱한 생강을 써는 느낌이 좋다. 얼마를 했을까 제법 상당한 양이다. 수분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베란다를 넘나드는 바람과 태양의 힘을 받기로 했다. 두세 시간을 그대로 두었다. 생강과 설탕을 일대일 비율로 해서 잘 버무렸다. 어느새 설탕이 생강 안으로 녹아든다.


생강, 모과, 유자, 사과, 대추는 가을이면 나를 찾아오는 손님이면서 선물이다. 올해 첫 주자는 생강이었다. 나를 위한 작은 노력이다. 껍질을 벗기고 손질하는 과정에 비해 결과물은 소박하다. 차를 만들고 나면 몸은 지치고 정리해야 할 그릇들이 쌓여 매번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다 해가 바뀌면 잊는다.


노랗고 빨갛고 저마다 고운 색을 자랑하는 녀석들을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다. 차를 만드는 일은 자연의 온기를 담은 열매들을 오래 두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투명 유리병에 담긴 차들은 한 폭의 그림이다. 볼 때마다 나무에 달려 있던 그때를, 땅속 깊은 곳에 뿌리내려 살아가던 날들을 그려보게 한다.


바람의 결이 조금만 달라져도 몸이 알아챈다. 손과 발이 찬 기운에 긴장하기 시작한다. 예민한 성격 탓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가을은 다른 이들보다 한 달은 빨리 찾아온다. 병원에서도 해법을 쉽게 찾을 수 없는 까닭에 쉽게 나를 돌보기 위한 일로 차를 마신다. 생강차에 유독 집착하는 이유다.


몸에 기운이 없고 아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 긴장하고 혼자 부산을 떤다. 물을 끓여 차를 마시고 스트레칭을 하고 핫팩으로 단전에 기운을 불어넣고 방어막을 친다. 잠깐의 멍 때리기나 잠을 청할 때도 있다. 이때 생강차 특유의 알싸함과 뜨거움이 식도를 지날 때 전해오는 짜릿함이 잠자던 기운을 깨운다. 잠깐 걱정을 내려놓고 차 한잔에 몸과 마음을 맡긴다. 커피가 나를 깨우고 할 일을 찾아준다면 생강차는 쉬어야 할 때를 알려준다.


한 해를 마무리할 즈음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마땅한 게 생각나지 않아 고민하고 있을 때다. 마침 차를 담근 지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이왕이면 정성이 더해진 차를 전했다. 받는 이들 모두 감탄한다. 손수 만든 것이라 한 병을 만들기까지의 수고로움을 아는 까닭에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징검다리가 됐다.


“언니가 준 생강차 그걸 마셔야겠네. 아끼고 아껴서 지금 딱 한번 먹을게 남았네요.”

오랜만에 안부를 물었던 친구가 몸이 힘들다고 얘기하다 건넨다.

벌써 다 먹었을 법한데 아직도 남겨두고 기억해 주니 참 고마웠다.


손으로 무얼 만들고 나누는 일은 오랫동안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준다. 생강차 한 병은 언제나 내 얘기에 귀 기울여 주는 동생 몫이다. 한결같음이 참으로 힘든 일인데 동생은 내게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다독여주고 헤아려준다.


우리 집 아이들도 얼마 전부터 차를 마신다. 건강을 위한 것이라며 아이들에게 반강제로 마시도록 했다. 가을부터 봄까지 아이들이 비염을 달고 산다. 약을 먹어도 효과는 일시적일 뿐 찬 바람이 불면 자꾸 답답해져 왔다. 며칠 전 목련차가 좋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스쳤다.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주문했더니 다음날 도착했다. 진도에서 자라는 목련이라는데 독특한 향이다. 집에서 지내는 요즘 아이들에게 숙제 검사하듯 아침저녁으로 차를 권한다.


남편 출근길에는 보온병에 국화차를 담아 보낸다. 아침을 차리는 일도 번거로운 시간에 차를 만들어 담는 일이 때로는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하루 이틀 사흘을 해보니 이제는 제법 몸에 익었다. 노란 국화꽃을 말린 것으로 머리를 맑게 하고 혈액순환에도 도움을 준다. 국화차는 컵 안에 아주 작은 국화꽃밭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순간이지만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차를 우려내며 남편의 건강을 위해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어찌했으면 좋겠다고 힘주어 말하는 일은 서로에게 상처로 남을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만 도움을 주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볍다.


가족 모두가 나름의 이유로 차를 마신다. 밥이 보약이듯 차를 마시며 몸과 마음을 돌봐야 하는 계절이다. 가을 어느 날 만든 생강차 한 병이 한겨울 매서운 칼바람 앞에서도 나를 지켜주는 작은 힘이 됐으면 좋겠다. 계절이 깊어지면 단단한 모과를 쪼개는 일에 힘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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