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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Sep 24. 2023

나를 세우며 케이크와 등뼈탕

비 오는 날 이질적이지만 매력적인 음식 

날씨와 기분이 하루를 보낼 음식을 결정하는 날이 많다. 그만큼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요리를 한다. 오후부터 비가 온다고 했다. 오전에는 초등학교 학부모 공개수업에 다녀와야 하고, 오후에는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를 데리러 가는 날이다. 다른 날보다 마음이 바쁘다. 그럼에도 이런 날은 이런 걸 먹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게 있다. 얼그레이 파운드케이크와 등뼈탕이다. 둘이 너무 이질적인 것들이지만 이것을 하루가 가기 전에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이 섰다.     


점심을 간단하게 먹고 우선 케이크를 만들었다. 학교 가기 전에 우유를 미지근하게 데운 다음 얼그레이 찻잎을 부어놓았다. 다녀와 보니 한 시간을 훌쩍 지나 적당히 잘 우러났다. 달걀 두 개를 노른자와 흰자로 분리했다. 흰자에 설탕을 넣고 머랭을 만들어 두고, 노른자에 설탕과 식용유를 넣고 잘 저었다.    

 

본격적인 반죽을 위해 달걀노른자를 섞어 놓은 볼에 밀가루를 채 쳐서 넣었다. 이어 밀크티를 붓고는 고르게 잘 젓고, 다시 흰자 머랭을 서너 차례로 나눠서 넣으며 반죽과 섞어준다. 처음에는 퍽퍽했던 것이 머랭이 들어갈수록 부드럽다.  반죽을 파운드와 시폰 틀에 적당히 나눠서 담아 180도로 35분을 구웠다. 


오븐에서 빵 굽는 냄새가 나기 시작할 무렵, 저녁에 먹을 뼈다귀탕 준비에 들어갔다. 이른 저녁을 먹는 아이를 위해서 재료를 손질했다. 동네 마트에서 사 온 등뼈는 끓는 물에 아주 오래된 위스키를 붓고는 5분에서 8분 정도를 데친다. 첫 손질 단계에서 알코올 성분을 추가하면 고기 맛이 깔끔하다. 고기에서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세 번 헹궈 주고 나면 압력밥솥에 담는다.  마른 생강 조금과 청양고추 3개를 솥에 넣었다. 이렇게 하면 고기 특유의 냄새가 사라져 훨씬 담백한 탕이 된다.     

비 오는 날 등뼈탕과 얼그레이파운드케이크

솥에서 딸랑 소리가 나고 30분이 지나면 고기가 다 익는다. 그다음엔 시래기 준비다. 얼갈이배추와 열무는 끓는 물에 데쳤다. 재료 준비가 이 정도면 본격적인 요리에 들어갈 때 손 갈 일이 없다. 아이가 학원에서 수업을 받는 동안 탕을 만들었다. 미리 준비해 둔 뼈다귀에 된장과 다진 마늘을 더한 시래기나물을 조몰락거린 다음 넣고 끓인다. 마지막으로 들깻가루를 넣는다.     


비가 와서 그런가 학원 수업을 끝낸 아이가 데리러 오면 좋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후다닥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집에 오자마자 저녁을 차렸다. 이제야 내 일이 다 끝나는 느낌이다. 먹는 일로 시작해서 먹는 일로 하루가 저문다.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 날은 내 일을 다 한 것 같은 뿌듯함이 있다. 


이 음식을 꼭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주문을 받고 제시간에 갖다 줘야 하는 것처럼 부지런히 움직였다. 좋게 보면 미리 계획을 세워서 준비했기에 여유가 있다. 더불어 미리 준비한다는 건 그만큼의 세심한 관심과 노력이 들어가기에 음식의 맛도 괜찮다.     


내리던 비가 그쳤다. 저녁까지 끝내고 나니 헛헛하다. 왜 이리 무얼 해야 한다는 마음에 나를 채찍질했을까? 파운드케이크는 내가 아이들에게 칭찬받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나이에 그것도 아이들의 박수를 기다리는  가슴속을 살짝 엿보았다. 존재에 대한 효능감이란 단어가 스친다.  몸 상태가 별로니 마음이 산란해졌다. 사람들이 종종 하는 말로 자존감 문제인가?       


오랜만에 먹고 싶었던 따뜻한 국물 한 숟가락을 뜨니 몸에 온기가 돈다. 내가 만들지만 반한 맛, 그것은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영역이다. 남이 해준 음식이 맛있다고 하지만 큰 만족감으로 다가올 때가 별로 없다. 내가 만드는 내 맛도 포기할 수는 없는 이유다.     


난 그리 적극적이지 않지만 부엌에서만큼은 다르다. 종종 나를 잘 모를 때, 힘들다고 느껴질 때 더 열심히 음식을 만든다. 물론 그 반대로 손을 놓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일어서야겠다고 의지를 가다듬을 때는 무엇이든 만든다.     


돌아보니 이날도 그런 하루였다. 어찌 보면 만들고 먹는 일까지 나를 향했다. 내가 작아지는 날, 그래서 무엇으로라도 나를 돋보이게 하고 싶을 때 부엌에서 분주해진다. 생활에서 적정선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나를 솔직하게 바라보고 품어줘야 할 때가 되었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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