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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Oct 06. 2023

늙은 호박, 가을 아침 즐거움 더하기

경험이 전하는 맛

오후부터 몇 시간 사이에 서늘하다 못해 추워졌다. 바깥 기온을 먼저 알아차리는 건 내 몸이다. 손발이 차가워지고 목이 살짝 따끔했다. 목을 면 스카프로 감으며 감기예방에 나섰다. 기다리던 가을이었지만 아직은 낯설고 긴장이 높아진다.

 

바뀐 계절 기운이 순간에 스며든다.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다 호박국을 끓이기로 했다. 어제저녁에 만든 김치찌개에 어울려 먹을 것으로 늙은 호박을 선택했다. 엄마가 보내준 앙증맞은 호박을 몇 주째 먹고 있다. 생각날 때마다 나물과 전 등 이런저런 음식을 만들었다.     


호박국은 어릴 적 먹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엄마는 집 간장에 진한 주황색 호박을 듬성듬성 썰어 넣고 마지막에 다진 마늘을 더해 한소끔 끓여낸다. 마지막으로 밥상에 올릴 때 깨를 적당히 뿌린다. 그때는 호박보다 달짝지근한 국물을 좋아했다.     


지금은 호박에 손이 먼저 간다. 어른들이 먹는 것이라 여겼던 아이가 반백이 될 무렵에서야 호박 맛을 알아간다. 호박은 어느 방향에서도 통통함으로 귀엽다. 멜론 조각 같은 모습으로 속을 파내고 냉장고에 보관하던 그것을 꺼냈다. 호박을 도마에 올려놓고 껍질을 벗기고 대충 썬다. 끓는 물에 호박 조각들을 넣고 익기 시작하면 집간장이나 참치액을 넣어 간을 맞춘다.     


마지막으로 청양고추 하나와 비장의 양념인 들깻가루 한 숟가락을 넣어 국물에 잘 섞이도록 한다. 고소하면서도 부드럽고 달큼한 호박국이 완성된다. 호박이 너무 익었는지 물컹거리지만 맛을 느끼다 보면 부드러움에 여유로움이 찾아온다.

호박 들깨국

국물을 떠서 넘기는데 청양고추의 톡 쏘는 매운맛이 정신을 깨운다. 그렇다고 입이 따가울 만큼이거나 다시 숟가락을 들기 어려울 정도의 강도가 아니다. 깨의 고소함과 서로 어울려 균형을 이룬다.  

   

호박국은 초등생 시절  가을이면 밥상에 올랐다. 이 음식을 떠올리면 그때 분위기도 살아나 머릿속으로 그리게 한다.      


아침해가 뜨고 그을음이 진 부엌에 햇살 한 자락이 들어온다. 아침밥을 나무 방석에 앉아 상을 펴고 먹었던 것 같은데  행복했다. 이 느낌은 어른이 되어서도 뚜렷하게 자리 잡았고, 호박국을 찾게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경험은 머릿속에 기억되기 전에 마음속에 간직된다. 그러다 적정한 시기에 떠올라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감정의 끈이 된다. 커가면서 다양한 일들을 겪었지만 선명하게 다가오는 건 먹는 것과 관련 있다.     


몸에 밴 어린 시절은 꾸준히 매일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것을 만드는 동력이 되었다. 밥상에 오른 음식들은 대부분 성장과정 한편에서 등장했던 것들이다. 그 아이가 어른이 되어 조금 더 확장시켜 요즘 입맛에 맞게 변형시켜  간다.      


매일 마주하는 식탁에서  한 그릇의 찬이 문득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날은 기분이 새롭다. 다른 이들은 모르는 나만의 세계가 열리면 그 속에 작은 즐거움이 있다. 엄마가 또 호박을 보내준다고 했다. 오후에 동네 언니가 시골에서 올라오며 호박 두 개를 두고 갔다. 이 계절을 보내고 남을 만큼 호박 부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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