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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Oct 09. 2023

“괜찮아”라며 생강차

가을에 하면 좋은 일 ①

생강을 만났다. 추석을 보내고 농협에서 운영하는 로컬푸드 매장에 장 보러 가니 흙이 잔뜩 묻어 있는 생강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잊고 있던 것을 기억해 낸 듯 반가웠다. 우선 한 덩어리만 사기로 했다.  지금은 첫 수확이어서 그런지 가격이 부담스럽다. 지난해 담가둔 생강차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라 당분간 먹을 것만 준비하기로 했다.  

    

집에 와서 흙을 털어내고 깨끗이 씻은 다음 어린 껍질을 칼로 살살 문지르며 벗겨내었다. 이제 막 적당히 잘 자란 상태라 살짝만 칼을 대어도 연한 노란 속살을 보여준다. 차를 담기 전에 은은한 바람결에 수분을 날리기로 했다. 쟁반 두 개에 깨끗한 종이를 깔고 썰어놓은 생강을 펼쳐놓았다. 이 시간을 거친 생강은 차를 만들면 쫀득하고 향이 진하다.    

 

흙 묻은 생강을 깨끗이 씻고 편으로 썬다음  바람을 만난 다음 차가 되었다.

가을이면 내 손을 몇 번 거쳐야 오랫동안 먹을 수 있는 이것에 몸을 의지한다. 찬바람이 불고 주변이 고요해지는 시기가 되면 종종 목이 불편하고 손발은 차갑다. 이럴 때 나를 위한 일이 생강을 사서 먹거리를 만드는 것. 주부로 지내면서 시작한 일이었으니 넉넉히 십 년도 훨씬 지났다. 처음 봉지 가득 생강을 들고 올 때는 손질할 생각에 부담이지만 몸을 움직일수록 과정도 즐겁다.     


그건 아마도 생강의 특별한 향 때문이다. 울퉁불퉁 이리저리 튕겨나갈 것 같이 제멋대로 생긴 그것은 흙 묻은 껍질에서조차 외면할 수 없게 존재를 각인시킨다. 어느새 옷과 피부 사이로 스며들어 안정을 찾아준다. 생강차를 마시며 따뜻한 기운과 쓴맛이 한데 어우러진 가운데 목을 넘길 때 따끔함은 불편한 기운을 순간 달아나게 한다.     


생강을 정리하고 썰어놓은 다음 설탕이나 꿀에 재워서 차를 만든다. 때론 생강만을 말려두었다가 끓여서 마신다. 모두가 적절한 노동과 관심이 필요하다. 얼마를 주고 편하게 이용해도 될 것을 해마다 애써가며 하는 이유가 뭘까 하고 돌아보았다. 내 몸에 대한 관심이었다. 마음과 몸이 함께 간다는 말에 진심으로 동의한다. 마음을 이성으로 느끼기 전에 몸이 말을 걸어온다. 힘들거나 때로는 좌절하고 불안한 현재의 내가 있다.    


그때 생강차가 고마운 역할을 한다. 몸을 편안하게 하면서 잠시 시간을 두고 쉬게 한다. 차를 끓여 마시는 동안 그동안의 일을 돌아보게 한다. 그때 사 온 것과 내 손을 거친 것 두 가지를 비교하면 후자가 더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때로는 어설프거나 심심한 듯 하지만 오래도록 생강 향이 머물다 간다.     

 

천천히 다가오는 분위기에 서서히 젖어든다. 이 시간을 위해선 햇생강이 나올 무렵 10월부터 생강이 시장에 나오는지,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편으로 잘린 생강 속으로 달콤한 설탕이나 꿀이 흡수되어 밖으로 나오기까지 기다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만들어서 절대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다. 

     

다른 음식들은 특정한  어느 한때를 위한 게 대부분이다. 생강차는 일 년은 족히 내 주변을 맴돈다. 혼자가 아니라 대상을 넓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도 한잔 건네면서 말한다. 

“이거 내가 직접 만든 거예요.”

이 한마디는 ‘정성을 당신에게 전하고 있다’라는 표현이다.   


2년 전 전주를 거쳐 완주를 가는 길목에서 ‘봉동’ 표지판을 만났다. 낯선 타향에서 아는 이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시골 마을 이름이 끌린 건 내가 좋아하는 생강의 주요 산지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사물을 향한 시선은  일상에서 나와 어떻게 정서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와 연결되어 있다.

  

가을이 더 깊어지면 생강을 많이 사 와야겠다. 유리병 가득 차를 만들어두고 다가올 추운 계절을 따뜻하게 보낼 준비를 해야지. 누군가의 위로를 기대하며 대상을 찾기보다는 한 발짝 물러서서 찻물을 끓이고 컵에 담으며 그리고 몸이 따뜻해지는 순간 “괜찮아”라고 얘기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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