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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Oct 13. 2023

따뜻한 사과청  

가을에 하면 좋은 일⓶

귀한 사과의 계절이다. 작년만 해도 배보다 사과를 편히 사 먹을 수 있었는데 올해는 역전되었다. 물가 얘기에 사과가격이 단골로 등장할 정도다. 집에는 추석 선물로 받은 사과가 몇 개 남았다. 언제부터 만들어둬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미뤄두었다. 사과를 사 먹기 힘들다는 아우성에 살짝 망설여진다.   

 

날이 선선하고 햇볕은 따뜻하다. 하늘은 별 움직임 없던 가슴이 설렐 만큼 파랗다. 장 보러 다녀오는 길에 이런 날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싶었다. 무엇이라도 의미 있다 여기는 걸 하기로 했다. 사과청 담기다. 겨울이 문 앞까지 찾아와 스웨터를 챙겨 입고,  목에 부드러운 스카프를 둘러야 할 때 꺼내 먹기로 했다.       


몇 해 전에 우연히 카페에 갔다가 사과 몇 조각이 들어간 음료를 마셨다. 지금 기억을 더듬어 보면 메뉴판에 적힌 이름은 '애플라테'였다. 별생각 없이 처음 보는 이름에 호기심이 일었는데 막상 받아보니  따뜻한 우유에 사과청이 들어가 있다. 은은한 사과맛이 올라오면서 우유의 고소함과 부드럽게  어울렸다. 사과의 아삭함은 설탕에 몰입되어 더 달큼하다고 느낄 무렵 살짝 사과향이 머물다 사라지는 게 좋았다.  

사과청

사과가 들어간 그것을 마셨던 첫인상은 집에서도 먹고 싶다는 의지를 싹틔웠다. 그 후로 사과청 만들기는 가을이면 가끔 하는 호사스러운 취미다. 과일을 쌓아두고 먹을 정도가 아닌 살림살이에서 굳이 차를 만드는 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여길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잊을만하면 다시 도마를 꺼내고 유리병 소독을 반복하는 건 나만 아는 작은 즐거움 때문이다.  


사과를 깨끗하게 씻고 씨가 박혀 있는 부분을 잘라내고는 채칼로  얇게 썰었다. 그래야 설탕이 절로 스며든다. 여기에 시나몬스틱을 하나 담기두면 진한 향이 사과에 배어들어서  풍부한 맛을 전한다. 집에는 롤막대 과자를 연상시키는 예쁜 것 대신 언젠가 사둔 둔탁한 계피조각이 있어 그걸로 대신했다.      


'가볍게'라는 단어를 좋아하는데 그것에 딱 맞는 일이다. 사과청 만들기는  그냥 놀이하듯 펼쳐놓고 해도 금세 끝난다. 베이킹소다로 사과껍질을 세심하게 문지르고 물로 씻어내는 과정만 신경 쓰면 나머지는 절로 된다 할 만큼 간다 하다. 썰어 놓은 사과 조각에 설탕을 일대일 비율이나 취향껏 넣고 잘 섞이게 한 다음 냉장 보관한다.      

사과를 만지며 얼굴을 찡그린 날은 없다. 사과는 한 손으로 들어도 될 만큼 적당한 무게다. 익숙한 사과 향은 편안함도 덤으로 전한다. 햇살을 잘 받고 자랐음을 증명하는 듯한 붉은빛은  다른 것을 기웃하게 하지 않는다. 앞에 있는 사과에만 집중할 뿐이다.  


사과하나를 꺼내어 한 조각을 과일로 먹고 나머지를 설탕에 절여놨다 몇 번 먹으면 금방 동이 날 만큼 적은 양이다. 유리병에 켜켜이 눌러 담았다. 간간이 껍질 부분이었음을 알려주는 붉은색 외에는 연한 노랑 과육이 설탕 안에 갇혔다.    

  

불과 몇 주 전에 작별한 여름은 에어컨과 선풍기를 점검하는 일로 계절의 문을 열었다. 다른 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가을은 이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기온이 서서히 내려가 추워진다는 사실은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조급함도 함께한다.  

생강차에 이어 사과청을 준비하는 것도 이런 습관이 자연스럽게 나온 모양이다. 그리 계획적이거나 체계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내게 부지런함은 먹는 일에 한정된다.  차를 내손으로 준비해 두는 건 언제일지 모르는 순간을 풍성하게 채우고 싶어서다. 그런 어느 날은 지금만 같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거나 더 좋은 한때에 대한 욕심 같은 바람이다. 


어찌 보면 꼭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한다는 생각이 스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맑은 사과색처럼 문득 선명한  부분이 있다.  사과청을 담는 잠깐은 고요한 기쁨이 흐른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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