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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Oct 20. 2023

달콤 단호박케이크

가을에 하면 좋은 일 ③

단호박케이크를 만들었다. 단호박은 이름처럼 단맛이 강하다. 알고 있는 맛이지만 다시 먹고 싶고, 진한 속살을 보면 절로 얼굴에 미소가 머문다. 아이들도 단호박이 들어간 빵을 좋아한다. 하루 전에 아이에게 단호박 케이크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먹을 것을 찾는지 냉장고 문을 몇 번 여닫으며 살피는 아이를 보니 갑작스럽게 나도 모르게 건넸다.     


엄마의 자동 반사 같은 반응이었다. 그날이 되니 숙제가 하나 놓인 기분이다. 안 해도 누가 뭐라 할 것은 아니지만 아이는 실망할 것이다. 집에는 단호박이 없다. 읽고 싶은 책이 있어서 동네 도서관을 잠깐 들렀다가 마트로 갔다. 햇 단호박이 나오던 여름 무렵에는 한창이었는데 지금은 열 개 안팎으로 모여있다. 가격과 호박 상태를 살피고 마음에 드는 걸 하나 골라 에코백에 담았다.   

   

집으로 돌아와 점심 한때를 쉬고는 오후 한 시 반 무렵에 단호박을 손질했다. 단호박을 씻고 칼로 반으로 자른 다음 호박의 줄 모양을 따라서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가운데 박힌 씨를 빼냈다. 전자레인지에 호박을 모아놓고 4분 정도를 쪘다.     


한 김 식힌 후에는 진한 주황색 속살을 숟가락으로 잘 긁어낸다. 달걀 두 개를 꺼내 노른자와 흰자로 분리했다. 우선 노른자에 식용유와 꿀, 으깬 단호박을 넣고 휙휙 잘 섞은 후에는 밀가루 150g과 베이킹파우더 5 그램을  함께 넣었다. 마지막으로 흰자 머랭을 만들어 둔 것을 두세 번에 걸쳐 나눠서 더했다.      

달콤 단호박파운드케이크

냉장고에 있는 플레인요구르트도 생각나 한 통을 다 넣었다. 집에서 하는 건 떠오르는 걸 마음대로 넣고 만들 수 있어서 좋다. 내가 선택하는 건 무엇이든 가능한 자유다. 케이크 반죽이 색이 노랗다 못해 진한 황금색이다. 맛보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어떨지 알 것 같다. 오븐에 180도로 35분을 구웠다. 부드러우면서도 진하고 순하다. 빵인지 아니면 쫀득한 양갱인가 싶을 정도다.      


호박파운드케이크는 가을과 어울린다. 빵의 표면에서 나오는 깊은 따뜻함은 이 계절이 전하는 분위기와 닮았다. 살짝 보면 나무에서 잘 익은 단감 같다. 다시 보면 수확을 앞둔 황금들녘이 생각난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날 따뜻한 커피와 말랑한 케이크 한 조각을 곁들이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언제부턴가 계절에 나오는 것들을 몇 번이라도 먹으려 한다. 그건 단지 보는 것과 다른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어서다. 늦봄에 나오는 양파를 보면서 여름이 다가옴을 알게 되고, 다시 여름에는 호박을 통해서 가을을 오고 있음을 확인한다.    


이것 또한 꽤 부지런해야 하는 일이다.  어느 한 시기를 지나치면 다음 해를 기약해야 한다. 요즘처럼 저장시설이 발달해 있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분명 제철 나는 건 다르다. 냉장고에 머물다 오지 않은 것에는 그것만의 향이 있다. 어슴푸레 느껴지는 흙과 바람, 비, 습기, 햇볕의 따스함까지 세상 속 자연의 냄새다.


채소나 과일이 비닐봉지에 담긴 것을 꺼내어 바구니에 넣을 때나, 음식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손질하기 직전에 들었을 때 이런 느낌이 전해진다. 종종 코 가까이 가져가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는지 찾아보려 할 때도 있다. 다른 날보다 떠오르는 게 많을 때는 내 가슴에 넉넉한 여백이 있는 날이다.     


단호박도 그랬다. 겉은 시냇가에 나뒹구는 돌멩이만큼이나 단단하다. 호박을 손질해서 찜통에서 찌거나 익히기 전까지는 다른 세계를 만나지 못한다. 호박에 열을 가하면 고구마 같은 순수한 달콤함과 아이스크림 붕어싸만코 같은 부드러움이 있다.  케이크로 태어나면 호박의 숨어있던 진실을 만난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따뜻한 색과 편안한 풍미다.      


주부의 시간은 언제나 넉넉한 듯하지만 절제하지 않으면 빨리 날아가 버린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내게 약속은 무게추 같은 것이 되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쉽게 내뱉으려 하지 않는다. 가을은 더 빨리 떠난다. 계절을 붙잡으려는 듯 아침에 한 가지씩 그날의 일을 만들어 지키려 한다. 다른 이들은 모르지만 계획한 것을 실천했다는 만족감이 나를 생동감 있게 한다. 케이크 굽기도 아마 그런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심플하게 사는 방법 중 하나가 현재를 살아가는 일이라고 했다. 가끔 아이에게 이 하루는 내 생에 하루뿐인 소중한 날이라고 말하며 학교를 보낼 때가 있다. 이 또한 스스로 인식할 수 있을 때 다른 날이 된다. 목요일을 단호박 케이크를 만들어 나눈 한때로 기억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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