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오래된 숲 속 정원
사평 들녘은 황금물결로 일렁이고 있었다. 추석날의 축제는 어제로 끝났다. 굽은 등에서 세월의 무게를 알려주는 노모와 50은 되어 보이는 듯한 아들이 호박넝쿨을 정리하고 있다. 요란한 가을 풀벌레 소리만이 정적을 깬다. 임대정 원림 안내판이 들어온다. 제방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연못이 있다. 얼마 전까지도 장관이었을 법한 연잎은 초록의 싱그러움을 감춘 지 오래다.
몇 해 전부터 가고 싶었다. ‘원림(園林)’이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신비로움에 빠져들던 때였다. 숲에서 한 세기 이상을 머물렀을 나무를 만났다. 임대정으로 올라가는 길은 잠깐이지만 설렘과 적절한 긴장감을 주었다. 오랜 시간 흙으로 다져진 작은 길을 천천히 걷다 돌계단을 오르면 정자를 만난다. 임대정 현판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앞에는 네모반듯한 작은 연못인 방지(方池)가 있다. 그 뒤로는 대나무 숲이 감싸고 있다.
처음 정원이 만들어져 있을 당시를 상상했다. 인적 드문 곳, 흐르는 물과 새소리 바람에 사각거리는 대나무와 나뭇가지의 흔들림 만이 머물렀을 것이다. 억지로 꾸미지 않고 주변 자연을 정자 주변으로 끌어들이는 옛 선인들의 깊은 속내다.
임대정 원림의 역사는 15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고반 남원기가 만들었던 고반원(考槃園)터에 고종 때 문신인 민주현 선생이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해 정원을 만들고 3칸 팔작지붕의 정자를 지었다. 임대정이란 이름은 송 시대 유학자이자 공자의 수제자인 염계 주돈이의 ‘종조임수대여산(終朝臨水對廬山’에서 따왔다. 정자 주변으로는 마을 살림살이 집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이제는 마을의 한 부분이 되었다. 예전에는 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시를 읊거나 서당으로 쓰였다고 한다.
세월을 간직한 나무들 사이를 오가며 절로 편안해졌다. 이곳의 역사를 알고 이해하는 일보다 앞선 게 내 몸과 마음이 반응하는 일이다. 삼시세끼를 위해 몸을 부지런히 하는 일과 내가 해야 할 일 사이에서 지쳐갈 즈음이었다. 나무들을 보니 그동안의 긴장과 스트레스가 온데간데없다.
이곳이 우리 집 앞마당이었으면 좋겠다. 무심해 보이는 모습이 주변과 조화롭다. 정자를 중심으로 앞에 못이 있고 나무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담양에 있는 명옥헌은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피고 지는 배롱나무가 주변을 감싸기에 화려하면서도 고요하다. 임대정은 절벽과 평지라는 서로 다른 지형이 주변을 바라보는 새로운 창을 만든다. 야트막한 공간에서 즐기는 풍경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만나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넓은 평야가 한눈에 들어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어지러운 마음을 품어 따뜻하게 안아준다. 숲을 이루는 정원에 머무는 순간 이곳에서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스친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바람을 맞으며 마음을 정리해 가는 글쓰기도 금상첨화일듯하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더니 갑자기 타사 튜더가 떠오른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 개척한 그의 인생에서도 정원을 빼놓을 수 없다. 30만 평의 대지를 일구어 작약과 장미 등 온갖 꽃과 나무를 심어 가꾸며 살았던 작가이자 정원사인 그의 인생 여정이 그려졌다. 지난해 EBS 다큐멘터리를 통해 정원에서 흙을 만지고 꽃씨를 뿌리고 구근을 심고 허물어진 담장을 정리하고 잡초를 뽑는 그의 하루를 만났다. 언제나 환한 미소로 사람들을 모으고 나누었다. 타샤는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인생이었기에 견디고 인내하며 어려움을 극복했다. 그의 정원은 그를 지탱해준 버팀목이었는지 모른다.
화려한 꽃들이 사계절 피어나는 서양의 정원과 나무와 풀 주변의 자연 풍광만으로 아름다움을 전하는 우리의 정원을 함께 바라보는 일은 특별하다. 임대정 원림 역시 자신만의 원림을 갖고 싶었던 민주현 선생이 나무를 심고 가꾸며 정성을 들인 결과다. 타샤 튜더와 민주현 선생은 다른 시대와 공간에 존재했지만 자연에서 머물고 싶은 마음만은 공통분모를 이룬다.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건 자연을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이다. 그 지극함이 원림을 만들었고 타샤 튜더의 정원을 탄생시켰다. 아름다움의 절정을 보여주는 정원은 그곳을 가꾸는 사람들의 숨은 땀방울이 함께 하기에 가능하다. 가을바람이 심상치 않은 날이다. 잎은 떨어지고 황량한 어느 날 임대정원림을 찾고 싶다. 스산한 바람 앞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정자와 연지(蓮池)는 생명이 찬란히 빛나는 봄을 기다리고 있을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