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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Feb 01. 2024

몸을 움직여 유자차 만들기

귀찮아도 해야 할 때 


집안 가득 유자 향이 돈다. 친정집에서 이것을 보내온 지 2주 만에야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엄마가 지인에게 유자를 받았다며 지난해 만들어둔 차도 있고 해서 몇 개를 남기고는 택배로 보낸다고 했다. 고흥에서 유자농사를 짓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다른 지역은 들어본 적이 없다. 고향동네 역시 귤농사는 여러 종류의 것들로 늘어가지만 유자는 보기 힘들어진 지 오래다.


“엄마 유자 귀한 건데, 잘 먹을게.”

신나게 전화를 받았지만 솔직한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내가 열심히 움직여야 유자차가 탄생하는 까닭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을부터 겨울까지 청이나 차를 준비하는 일을 기꺼이 즐겼다. 그러다 이제는 좀 귀찮아지기 시작하는 중이다.   

  

유자가 우리 집에 오기까지 거쳐야 하는 과정이 선하다. 엄마가 상자에 포장하고 나면 언니가 택배대리점에 붙이고, 하룻밤을 보내면 우리 집에 도착한다. 적잖은 수고로움이 따르는 일이기에 잘 활용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서도 문 앞에 배달 기사님이 두고 간 상자를 보는 내 시선은 그리 기쁘지 않다. 집안으로 들이면서부터 멀리했다.     


유자가 도착하던 날, 3년 만에 열린 고등학교 친구모임에 다녀왔다. 다음날에도 방학 맞은 아이들과 삼시 세끼를 만들어 먹다 보니 하루가 훌쩍 지났다. 유자를 정리할 시간이 없던 건 아니다. 그냥 하기 싫다. 요즘 나를 이루는 큰 감정 중 하나가 무력감이다. 평소 하던 집안일은 거르지 않는다. 다만 꼭 하지 않아도 되지만 하고 싶다고 생각했거나, 해 두면 좋은 것들에 대해선 외면하는 게 이전과 달라진 점이다.   

유자차가 되기까지

유자가 십여 일을 한라봉 상자 안에 꼭꼭 숨어 있어야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어제부터 조금씩 힘을 내려는 중이다. 동생과 얘기하다 지금 내 모습이 묵혀둔 불안이 고개를 내밀었다는 걸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이런 감정을 갖고 지내기엔 흐르는 시간이 아까웠다. 천천히 움직이며 리듬을 찾아보기로 했다. 미뤘던 일 하기, 그 첫 번째가 유자차 만들기였다.      


어제는 베이킹소다로 유자를 깨끗이 씻었다. 차를 마실 때 껍질까지 먹기에 정성을 들여야 한다. 소쿠리에 십여 개가 넘는 꽤 큰 유자가 담겼는데 이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건 내 노동이 더해져야 가능하다. 


아침밥을 먹고 남편이 회사로 출근하자마자 식탁 위에서 유자를 썰었다. 유자를 손질하는 시간이 더해질수록 온몸에 향이 스며들면서 기분도 좋다. 칼을 들어 유자 꼭지를 도려내고 작은 크기로 썰기 시작했다. 유자 하나가 정리될 무렵 도마에는 유자즙이 가득해 깜짝 유자계곡이 만들어졌다.     


유자는 일반 귤보다 비교적 두꺼운 껍질 때문에  칼의 성능이 중요하다. 칼날이 무딘 것 같아 칼갈이로 쓱싹쓱싹 서너 번 이상 손보고 다시 도마에 섰다. 훨씬 칼이 잘 드니 써는 기분이 가볍다. 그렇게 유자가 큰 스테인리스 양푼에 가득 담겼다. 설탕을 넣고 잘 섞은 다음 유리병에 담고는 뚜껑을 닫았다. 최소 한 달은 냉장고에서 보내야 만날 수 있다. 

  

유자차를 본격적으로 담기 시작하건 주부가 직업이 되면서부터다. 이웃 언니가 준 것으로 시작해서 이번이 예닐곱 번째다. 초겨울 즈음이 정석이라 여겼던 것을 입춘을 며칠 앞둔 날에야 하게 되었다. 다른 때 같으면 겨울날 따뜻한 유자차 한잔을 기대하지만 이번에는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나 더운 여름날 유자에이드를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본격적인 아침 활동을 하기 전에 큰 숙제 하나를 끝냈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기분이 들 때는 작은 일 하나라도 해 놓게 되면 다른 것까지 해결하는 촉매제가 된다.      


씁쓸함 뒤에 다가오는 달콤함, 유자차의 맛이다. 유자의 빛깔은 봄에 더 어울린다. 열심히 유자를 썰면서 혼자 다가올 계절을 맞이하는 기분이었다. 유자차는 지금 당장 먹을 수 없고 맛들 시간이 필요하다.  끈적한 청 속에 빠진 유자는 얼굴을 찡그리게 되는 강한 신맛을 모두가 받아들일 정도로 약해지는 그때가 되어야 제 역할을 한다. 지금보다 날은 따뜻해지고 여기저기 꽃이 피고 새싹이 돋아날 무렵이면 가능할 듯하다. 그때의 내 봄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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