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즐거운 맛
맛을 알면 다시 찾게 된다. 모르면 지나쳤는지만 오감으로 다가온 느낌을 경험하면 그러긴 힘들다. 먹는 일은 그래서 반복적이다. 이 과정에서 취향이 만들어진다. 결국에는 평생을 간직하게 될 음식에 대해 좋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자리 잡는다.
음식을 만드는 일은 어떨까? 매일 쉼 없이 반복되지만 자꾸 잊어버린다. 설령 특별한 것에 도전했다 해도 그날이 지나면 사라진다. 그러다 그것을 다시 만나는 날은 도전의 시발점이다.
오랜만에 집을 벗어나 좀 멀리 있는 공원에 봄 산책을 나왔다. 근처에 호수가 있어서인지 아직은 싸늘하다. 그럼에도 덱 위를 걷다가 보이는 막 싹이 돋기 시작하는 나뭇잎과 버들가지, 할미꽃, 멀리서 펄렁이는 벚꽃나무가 봄이 왔음을 알려준다.
집으로 가기 전에 아쉬워서 몇 년 전 들렀던 도넛 가게가 있는지 살폈다. 이른 시간임에도 문을 열었고, 앞에는 사람들이 모였다. 외출의 마지막은 달고 부드러운 것이 있어야 제대로 보낸 것 같다. 만 원을 주고 찹쌀도넛과 꽈배기가 들어간 세트를 샀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특유의 기름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바로 상자로 손을 가져가 먹고 싶지만 아이는 집에서 먹는 게 편하다며 애써 참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진한 갈색의 말랑말랑한 찹쌀도넛을 아이가 집어 든다. 이날 찹쌀도넛 경쟁이 상당했다. 4 개밖에 안 되는 그것을 두고 나름 눈치작전이 펼쳐질 정도다. 공원 옆 가게에서부터 살짝 싹트기 시작한 찹쌀도넛에 대한 관심이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하루 앞으로 다가온 선거일인 동시에 휴일, 온 집안을 기름 냄새로 채우긴 싫다. 미리 여유 있게 혼자 소꿉놀이하듯 만들고 싶었다. 꼭 하겠다는 확신이 들기 전부터 핵심인 팥부터 물에 담갔다가 삶았다. 팥소를 만들어 두면 언제라도 도넛을 튀겨내는 일은 그리 복잡하지 않으리라는 예상이었다.
단단했던 팥이 물러지는 동안 도넛을 해봐야겠다는 결심이 서면 그때 하기로 했다. 오후에 들어서니 물러진 팥을 블렌드로 돌리고 설탕으로 단맛을 조절했다. 너무 고운 것보다는 성근 팥알갱이를 좋아해서 그리했더니 역시나 맘에 쏙 든다.
팥소를 그냥 두기 아까워서라도 도넛을 만들기로 했다. 냉동실에 있는 찹쌀가루를 꺼내 잠시 두니 부드러워졌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에 사람들의 레시피를 쓱 살폈다. 대부분 비슷해서 어느 곳 하나를 따라 했다. 찹쌀가루와 중력분, 베이킹파우더와 설탕, 소금을 모두 한대 놓고 채를 쳤다.
익반죽해야 하기에 반죽에 뜨거운 물을 붓고는 숟가락으로 잘 섞는다. 그다음은 손이 나설 차례다. 밀가루와 찹쌀가루가 잘 섞이게 주물렀다. 둥근 반죽을 만든 다음 20분을 쉬게 했다. 그러고 나서 딱 10개 도넛을 만들었다. 반죽 하나를 들어 가운데를 손으로 꾹 누르고 앙금을 넣고 여몄다. 반죽에 소를 적당히 넣고 잘 감싸야하는데 살짝 삐져나와 반죽을 조심스럽게 정리했다.
도넛을 끓는 기름에 풍덩 하고 빠트렸다. 금방 갈색으로 변한다. 다 익은 도넛은 먹는 즐거움을 위해 흰 설탕을 묻혀내었다. 갈색과 흰색이 이리도 잘 어울리는 건 도넛에 한정된 듯하다. 벚꽃이 피어 바람에 떨어지는 날 우리 집에는 찹쌀도넛 꽃이 피었다. 하얗고 둥근 그것이 기름에 들어가 점점 커지는 게 꽃봉오리에서 몰래 활짝 피어나는 꽃과 닮았다. 입안에서 도넛이 즐거움을 선사하니 가슴속에도 잠깐 꽃이 피었다.
아이들이 좋아해서 직접 해주고 싶다는 마음 이전에 다른 것이 있었다. 내가 만드는 것과 가게에서 노련한 이의 손을 거친 게 어떻게 다른지 궁금했다. 모른다는 게 도넛을 해 봐야겠다는 첫출발이었다. 시작부터 무게를 두지 않았다. 오랜만에 심심해서 하는 마음으로 했는데 예상보다 좋은 결과다.
잘해보겠다는 의지가 있던 것도 아니다. 별로면 그냥 사 먹자 여기니 잘 되고 안 되고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볍게 가볍게 시작하면 결과를 받아들일 때도 단순하다. 그러다 뜻밖에 좋은 결실을 맺으면 행운 같다.
다른 때보다 신경을 썼다면 팥소를 만드는 과정에서 조려지는 팥에 말 걸기다. 갑자기 일본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에서 도쿠에 할머니가 팥소를 만들며 온정성을 담는 장면이 떠올라 한번 해보았다.
“맛있는 팥소로 태어나줘. 알았지.”
혼자 있는 부엌임에도 어색함과 부끄러움이 교차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용기를 내어 냄비에 있는 팥을 향해 한마디 건넸다.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팥소는 내가 원하는 만큼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팥소를 만들고 쫄깃하고 달곰한 찹쌀도넛이 태어났다. 동시에 내 요리책에 새로운 메뉴가 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