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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Apr 26. 2024

아이의 말, 나의 말

듣기의 어려움  

아이가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말을 건넨다. 하루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속에서 어떤 경험을 했고 감정은 어떠했는지 전한다. 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그려질 만큼 선명하게 다가온다. 아이는 섬세하다. 다른 말로 하면 예민해서 여러 가지에서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불편한 일들에 대해선 억울함 같은 게 잔뜩 묻어난 이야기를 한다. 


 “친구들이 나를 만만하게 보는 건가?”

그날도 이 말로 학교 일을 한참이나 말했다. 나도 겪어봤음 직한 일들이기에 그때의 기분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잘 듣다가도 어느 지점에서 평정을 잃어간다. 반응하는 내 목소리의 톤이 높아지면서 짜증이 조금씩 섞였다. 다시 정신을 다잡고 하던 부엌일을 멈추고 듣기 시작했다.   

   

한참을 들었다. 아이는 친구사이에서 마음과 달리 흘러가는 일이 많아서 속상해했다.  

“네가 어떻게 하면 편해질지 생각해 볼래. 어떤 상황에서도 네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어. 그것이 그 순간을 견디어내는 답이 될 거야.”

이런 말을 아이에게 건넨 지가 조금 되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편안하지 않더라도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잘 지내고 있다는 것.     

아이에겐 어려울 수 있지만 알려주고 싶었다. 타인의 태도에 의해서 감정이 좌우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는 아이가 되었으면 했다.  아이의 지금 고민은 살아가는 일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모든 사람의 어려움이기도 하니까.  

 

그렇다고 아이가 내가 전한 전부를 이해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나 역시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은데 초등학생인 아이는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반복적으로 나누다 보면 가슴으로 알게 될 때가 있지 않을까.    

 

아이와 말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동시에 나를 보게 된다. 정신없이 얘기를 나누는 그때가 지나면 당시에 내 감정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살필 때가 있다. 들어주다 내 마음이 날개를 달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면서 아이에게 내 생각을 강요한 듯한 날은 멈칫한다. 나 역시 대범한 듯하다가도 걱정이 크게 고개를 들 때면 일상이 잔잔했으면 하는 강한 바람이 인다.

 

아이는 친구가 부당한 얘기를 했을 때 바로 반응하지 못하면 집에 와서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랬구나. 말은 우리가 언제 해야겠다고 정해놓고 할 수 있는 건 아닌 거 같아. 하고 싶을 때 바로 해야지. 그때가 지나면 괜히 어색해지더라고. 그러니 네가 하고 싶을 때 화내지 말고, 보통처럼 얘기하면 좋을 것 같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의 감정보다 타인의 행동에 중심을 두기에 반응해야 할 때를 놓친다.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이걸 쉽게 할 수 있다면 세상에 나오는 마음에 관한 수많은 책은 효력을 잃을 수도 있겠다. 

      

저녁이 되어 아이는 우연히 EBS에서 방송하는 관계와 자존감에 대한 정신과 의사의 강의를 들었다.

“엄마, 지금 하는 얘기 내 얘긴데. 내가 친구 문제로 고민하잖아. 그럼 나도 자존감이 낮은 건가?”

아이는 강사가 말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이날 방송내용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어려워하는 이들 대부분은 자존감의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이가 열심히 듣고 있기에 그대로 두었다. 어설픈 설명보다는 아이가 끝까지 들으며 정리하는 게 좋을 듯했다.     


“엄마 학교 가기가 싫다. 내가 친구 문제가 있잖아.”

다음날 아이는 가방을 싸고 나가기 전에 한마디 했다. 아이에게 옆에 앉으라고 하고는 성호경을 긋고는 기도했다. 

“너는 세상에서 유일한 가장 소중한 존재야. 다른 사람이 너를 좋아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건 네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러면서 말을 이어갔다. 혼자 지낼 때도 있지만 그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그러면서 아이가 어떤 상황에서도 잘 지낼 수 있다고 전했다. 

  

아이를 보내고 운동을 다녀온 후에 식탁에 털썩 앉았다. 아이처럼 학창 시절 친구와 힘들었던 일이 살짝 되살아나면서 가슴이 아팠다. 아이도 이제 본격적으로 세상으로 나아갈 연습을 시작하나 보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잘 들어주는 것. 피곤한 몸과 복잡한 머리로는 진심으로 들어주기는 어렵다. 그러니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마주할 때  귀를 열어두기 위해 푹 쉬어야겠다. 돌아보니 아이에게 쉼 없이 던진 말은 결국 내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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