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쪽파 크림치즈 만들던 날
부엌에서의 봄은 어제보다 풍성해진 초록 장바구니에서 온다. 하루가 다르게 시장에 나오는 먹거리들이 늘어난다. 쑥과 냉이, 머위, 달래에서부터 이름 모를 채소들이 주인을 기다린다. 그중에서도 쭉쭉 곧게 뻗어 초록 잎과 땅에 뿌리내리고 얼마간 커왔음을 알려주는 흰 줄기를 지닌 쪽파도 있다.
쪽파는 겨울에도 추위를 단단히 막아줄 비닐하우스가 있으니 사계절 만난다. 그럼에도 봄기운이 맛을 끌어올려야 손이 더 간다. 그동안 쪽파는 김치를 담거나 양념으로 주로 사용했다. 가끔 무치거나 파전, 강회를 만들기도 했지만 특별하다 여겨지는 요리는 없다. 그러다 문득 다른 것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파 몇 가닥을 보다가 크림치즈와 섞고 그것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베이글 가게에 가면 유독 여러 종류의 크림치즈가 눈길을 끈다. 익숙한 블루베리나 견과류의 조합부터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것들이 모여있다. 베이글 앞에 붙은 수식어를 보고 대충 무엇이 들어갔는지 짐작할 뿐이다. 그것을 볼 때마다 원하는 재료에 치즈를 섞어주면 간단히 될 것 같아 딸기잼, 혹은 사과 같은 과일을 다져 넣었다.
이번에는 쪽파 크림치즈를 만들기로 했다. 이름처럼 쪽파 서너 가닥을 다지듯이 가늘게 채를 썰고 나서 크림치즈와 섞었다. 혹시나 파 맛이 강할 것 같아 꿀 한 티스푼도 더했다. 이 과정이 끝나자 바로 식빵 두 조각을 구웠다. 빵 한편에 쪽파 크림치즈를 바르고 좋아하는 당근 볶음을 가득 올렸다. 상추와 사과, 치즈 순으로 차곡차곡 쌓아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간간이 쌉쌀한 듯하면서도 고소한 파 향이 올라온다.
심심한 점심이 샌드위치 하나로 그럭저럭 분위기가 살아난다. 전에 해보지 않았던 것을 만들어 먹으니 내 표정이 순간순간 바뀌는 게 느껴진다. 달콤함이 머물 땐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파 특유의 진한 끈적임과 매운맛이 다가올 때면 입을 부지런히 움직여 넘기려고 노력한다.
다른 식구들은 다들 제 일을 하기 위해 나갔으니 권해볼 사람도 없다. 내 부엌에서 마냥 원하는 일을 살며시 해본다. 유독, 이 공간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래서 지루할 틈이 없이 살아나는 곳이 부엌인 듯하다.
내가 먹는 것이기에 촘촘히 신경 쓰지 않는 게 대부분이다. 나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면서도 이럴 땐 그동안의 주장을 비켜간다. 다른 이에게 너무 신경을 써서 그러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내게 주어진 적당한 자유와 평화로움이다.
샌드위치를 만들다가 대충 하고 있음을 알았다. 평소처럼 빵과 여러 재료들 사이가 꽉 차서 양손으로 잡았을 때 불편함이 없도록 해야는데 이건 뭔가 어설프다. 빵을 반으로 잘라보니 사이사이에 숭숭 구멍이 나 있다. 한입 베어 물고 나니 당근이 접시 위에 몇 가닥 떨어진다. 그것을 혼자 흠잡다가 멈췄다. 잘하지 않아도 샌드위치인건 분명하기에 다른 이유를 드는데 힘을 쓸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부풀려 보면 이건 내게 향하는 유연함이었다.
생의 첫 쪽파 샌드위치를 만난 보통의 특별한 날이었다. 파 특유의 향이 치즈와 어울려 중화되었다. 그것과 다른 채소와의 어색함도 한편으로 이상하지 않다. 쪽파 맛을 이날처럼 잘 알기 위해 감각을 총 동원했던 적이 없다.
봄날에는 땅을 친구 삼아 세상으로 고개를 내미는 이들이 많다. 그중에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은 나물 종류가 대부분이다. 봄을 오롯이 느끼는 일은 보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눈으로만 계절을 담는 일은 자칫 겉모습을 전부로 여길 수도 있다. 봄을 맛볼 수 있다면 계절이 몸과 마음속으로 더 깊이 찾아올 것이다.
다음에는 샌드위치에 봄나물을 올려보고 싶다. 취나물이나 참나물을 들기름으로 무치고 나서 향긋한 사과 한 조각과 모차렐라 생치즈를 올리며 어떨까. 곡우가 지나고 이제 봄도 작별을 준비하는 모양이다. 앞으로 봄에만 만날 수 있는 것들로 샌드위치를 몇 개나 더 만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