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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안 자리 찾기

요리하고 싶다면 살피기

by 오진미

아침부터 냉장고 정리에 들어갔다. 아침밥도 먹기 전에 이 일을 제일 먼저 생각해 냈다. 얼마 전부터 해야 할 목록에 들어 있었다. 날이 따듯하고 적당한 바람이 있는 습하지 않은 날 하기로 생각했다. 날씨는 바람과는 정반대다. 긴 연휴에 쉬어 가라고 하는 것인지 잔뜩 흐렸다. 오후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도 있다.


이것을 해야 할 조건은 별로였지만 마음이 갔다. 선반부터 꺼내어 그곳에 있던 것들을 꺼내어 신문지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냉장고에 있는 것 중 소스 병이 상당하다. 일렬로 세워보니 절반이상을 차지할 정도다.


씻은 그것이 물기가 어느 정도 빠지자 행주로 닦아내었다. 그리고는 무게와 그릇 높이, 사용빈도에 따라서 물건을 정리 상자에 담았다. 그다음은 본격적으로 냉장고의 중심축인 냉장실 정리다. 여기에도 지금 먹을 수 있는 것보다 음식을 만들 때 필요한 양념류가 대부분이다.


뜨거운 물에 행주를 빨고 닦기를 서너 번 하니 곳곳이 환해진다. 냉장고 안을 비추는 불빛은 여전하지만 뭔가 달라진 분위기다. 그렇게 30분 남짓하니 냉장실이 말끔하다. 시계를 보니 8시가 다 되어간다.


냉동실은 다음으로 미뤘다. 햇빛이 짠하고 빛나는 날 하기로 했다. 날이 흐리니 차가운 것에 손을 담그기가 별로다. 냉장고의 절반은 그대로인 셈이다. 또 언제 하고 싶은 마음이 찾아올지 모르겠다.


막연히 언제 해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그 일의 절반을 끝냈다. 문을 닫으면 아무도 알 수 없는 냉장고 속 세상이지만 하루에도 그곳을 수차례 여닫는다. 무엇을 먹고 싶다는 분명한 이유로 찾게 되니 이곳만큼 확실한 목적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곳은 드물다.

냉장고는 온도에 민감한 먹거리를 보관하는 소중한 장소다. 더불어 식탁을 위해 시간을 벌어주는 곳이면서 가장 편하게 무엇이든 받아줄 것 같은 공간이다.


문득 드는 생각은 청소는 보이는 곳보다 그렇지 않은 곳에 신경 써야 한다는 것. 내 기준으로는 그런 집안 구석들을 돌봤을 때 만족감이 크다. 냉장고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가족들 누구나 그곳의 상황을 알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때로는 여러 가지가 쌓여있어 원하는 것을 못 찾을 때도 종종 있다. 심지어는 바로 앞에 놓인 그릇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냉장고를 몇 시간 안에 다시 열었다.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한눈에 잘 들어온다. 필요한 것만 적당히 사는 터라 공간이 헐렁하다. 동시에 지금 내가 무엇을 가지고 어떤 음식을 해 먹고 있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윤곽이 보인다. 미리 만들어 둔 음식이 없는 걸 보면 요즘은 정말 단출한 식탁을 꾸미는 모양이다.


이 시간이 오기까지 몇 주는 지났다. 냉장실 문을 열 때마다 문제의 심각성을 알았지만 모른 척했다. 누가 뭘 하라 하는 이가 없다. 문을 닫는 순간 이곳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의지가 사라진다.


바로 닥친 일에만 신경을 쓰다 잊힌다. 자발적인 외면이다. 누구처럼 너무 바빠서 못한다는 말도 내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러다 때를 놓치는 일도 맞닥뜨린다. 하루 이틀 전만 정리해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버려야 할 때는 기분이 별로다. 생활에서 확인해야 하는 것들에 신경을 쓰지 않은 날이 얼마 되었는지 마주하는 때다.


기분이 좋아서 이유 없이 다시 한번 냉장고를 열었다. 무엇이든 꺼내서 맛있게 요리하고 싶은 마음도 샘솟는다. 당장 내일만 지나면 습관처럼 어질러질 가능성이 크지만,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생활이 확 바뀐 기분이다. 그리고 냉장고 정리는 내 의지만으로 충분히 해결되는 간단하지만 만족도가 꽤 높은 일이다.


냉장고 문을 닫아 두지 말아야겠다. 필요 없이 문을 여는 게 아니라 언제라도 내 눈앞을 가로막는 게 있다면 적당한 위치를 찾아주는 정리의 힘을 발휘해야겠다는 혼자만의 다짐이다. 그동안은 냉장고 문을 닫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한 날들이 많았다. 이건 괜찮은 게 아니라 언제라도 돌아올 일상의 어려움을 스스로 키우는 일이었다. 잠시 냉장고 정리 하나로 맑아진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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