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케이크 맛
노란색이다.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놓는 순간 신 느낌이 강하게 올라온다. 가끔 카페에서 투명한 유리병에 놓여 있는 얇게 썬 서너 조각에 끌리는 날이 있다. 레몬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알지만 먼 과일이었다. 귤농사를 짓는 집에서 태어나 늦여름부터 겨울을 지나 초봄까지 그것이 유일한 과일인 양 지냈다. 그러다 초등학생 시절 피아노 교습소 선생님 과수원에서 레몬 나무를 마주했다. 이름만 듣던 그것의 실체를 마주하니 처음에는 놀랐고 귤보다는 길쭉하다는 인상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 지난해부터 레몬이 가끔 생각났다. 주위에서 레몬청을 담갔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렸지만 나와는 상관없었다. 어디인지도 모를 먼 나라에서 온 것이어서 그랬다. 기본적으로 농약을 많이 사용했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태도가 자리 잡았다. 그러다 우연히 농협에서 운영하는 동네 로컬 푸드마켓에서 제주도 레몬을 만났다. 연두와 노란색, 연한 초록을 띈 레몬 3개가 플라스틱 포장지에 싸여 있었다.
그때도 그것으로 레몬 케이크를 만들었다. 베이킹소다로 빡빡 문지른 다음 껍질에서 즙까지 모두 사용했다. 그대로 먹으면 신맛에 당연히 거리를 둘 것이 분명하지만 설탕과 밀가루를 만난 빵 속 레몬은 완전히 다른 상황을 연출했다. 은은한 시트러스 향과 달콤함에 부드러움까지 레몬은 형체 없이 내게 완전히 밀착되었다.
우리 땅에서 나는 레몬이라는 이유가 컸다. 국내산 레몬은 다양한 빛깔을 내고 꼭지가 아직도 초록색으로 싱싱하다. 이번에는 장성에서 난 것을 골랐다. 레몬 5개가 봉지에 담겼다. 장을 보던 중에 그것을 발견하고는 무엇을 해야겠다는 분명한 의지 없이 바구니에 넣었다. 집에 있으면 무엇이라고 할 것이라는 미래를 향한 불투명한 계획을 믿었다.
며칠을 보내고 우선 레몬청을 담았다. 추운 겨울날 가끔은 시큼한 레몬차를 마시며 밖에 흩날리는 함박눈을 바라보고 싶었다. 흰 눈과 레몬차는 서로가 잘 어울리는 듯했다. 바람에 흩날리듯 하다가 땅에서 녹아버리는 눈과는 달리 레몬은 마시고 난 후에도 혀끝에 묘한 흔적을 남긴다. 쓴듯하지만 그렇지 아니하다. 찬바람이 들어갈세라 한 겹 두 겹 꼭꼭 싸매게 되는 일상과는 달리 가벼운 상쾌함이 무거운 몸을 움직이게 한다.
아이의 생일이다. 불과 며칠 사이로 생크림 케이크를 먹었다. 그것보다는 다른 것이 어울릴 것 같다. 아이에게 물었더니 레몬 케이크를 원한다고 했다. 크림 없는 단순한 둥근 것을 만들기로 했다. 그런대로 괜찮은 걸 만들기 위해 다른 이의 조리법을 찾다가 간단하지만 결과는 훌륭한 것을 찾았다. 재료 개량도 컵 기준으로 되어있다. 컵이라 해도 어떤 것인지 정확히 나와 있지 않아서 그냥 종이컵을 사용하기로 했다.
달걀 3개와 밀가루, 식물성기름 2컵, 우유와 설탕 1컵, 베이킹파우더와 소금 조금이 들어갔다. 레몬 하나를 기준으로 껍질과 즙도 전부 사용한다. 생일케이크인데 너무 간단히 만드는 것 같아서 잠시 망설였다. 그래도 완성된 화면을 보니 내가 바라는 것에 가까웠다. 오후 무렵에 만들기 시작했다. 달걀을 잘 푼 다음 설탕과 식물성기름, 우유와 밀가루 등을 넣고 잘 섞고는 둥근 케이크 팬에 부었다. 이 과정에서 당연히 레몬껍질 간 것과 즙도 들어갔다. 180도에서 40여 분을 구웠다. 십여 분이 지날 무렵부터 달콤하고 싸한 레몬 향이 나기 시작했다.
오븐 타이머가 멈췄다. 열어서 보니 색이 정말 곱다. 큰아이와 운동 다녀오는 길에 다이소에서 노랗고 흰 병아리 모양의 생일초를 사 왔다. 케이크를 두고 저녁에 온 식구가 둘러앉아 한 조각씩 나눴다. 모두가 조금 더 찾을 만큼 매력적인 맛이었다. 코끝을 찡하게 스치는 겨울바람은 뒤로하고 봄이 천천히 찾아오는 것 같은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모두가 폭신한 케이크가 주는 편안함만으로 레몬을 알았다.
남편은 다음에도 케이크는 언제나 환영이라며 또 해달라는 예약 메시지도 남겼다. 장성에서 난 레몬으로 했다는 말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분위기다. 혼자 그것을 강조하면서도 어느 농장인지는 모를 그곳에 가고 싶었다. 이제부터 레몬에 대한 인상이 생겼다. 겨울날, 레몬 케이크 한 조각으로 계절의 중심에서 가벼워질 수 있다는 것. 레몬은 껍질은 물론 과즙까지 케이크 안에 꼭꼭 숨었지만, 누구나 확인할 만큼 살아있다.
한파가 몰아치는 날에도 레몬 케이크 한 조각과 따뜻한 차 한잔이면 그런대로 훌륭한 하루다. 그리고 가끔은 식탁에 레몬을 올려두고 오가며 빛나는 색을 바라보거나, 살짝 한 손으로 그것을 감싼 다음 손가락 사이에 스며든 향기를 맡고 싶다. 하루하루가 별로라며 답답해지는 날도 이것으로 무엇인가 만들어야지. 그날은 레몬 이 간직한 시지만 미워할 수 없는 향기가 나를 깨워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