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는 일
당근을 다 먹으면 꼭 그날 마트에 가야 한다. 쌀독이 빈 날보다 급해진다. 아마 다른 어떤 채소보다도 아끼는 것. 먹는 일은 즐거움과 기대가 한줄기를 이룬다. 주황색 적당히 기다란 이것을 향한 마음도 그렇다.
당근에는 비타민 A가 풍부해서 시력보호와 면역력에 도움을 준다. 몸이 아프다는 건 염증이 어딘가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의미다. 당근을 좋아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릴 적에는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엄마가 가끔 만들던 잡채에 꼭 들어가는 채소였다는 기억만이 선명하다.
그동안 이것과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면 올겨울 들어서면서부터 급하게 친해졌다. 시간을 두지 않고 너무 빨리 가까워진 관계는 그만큼 오래가기 힘들 수도 있다는데 아직은 모르겠다. 매일 아침 샐러드에는 데친 양배추와 브로콜리, 당근을 기본으로 해서 사과나 다른 과일이 모인다
소스와 적당히 버무려진 당근은 아삭하고 달콤하다. 그리 단단하지도 물렁이지도 않다. 적당히 입안에서 살아있지만 그렇다고 날것 그대로도 아니다. 음식을 만들 때 조연이라고 여겼던 이것에 자꾸 눈과 손이 간다. 샐러드를 만들기 전이라도 한 두 개를 집어 입에 넣는다. 당근 특유의 향과 달콤함이 익숙해지는 가까운 친구가 되어가는 모양이다.
어느 토요일 아침에는 수프를 만들었다. 겨울 여행에서 맛봤던 음식이었다. 친정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호텔에 있는 브런치 레스토랑에서 온 가족이 점심을 먹었다. 여러 음식이 있었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건 당근 수프였다.
집 밖에서 좋은 기분이 들었다면 다시 내 공간으로 끌어오고 싶다. 물건도 그러하지만, 음식도 다르지 않다. 잔뜩 흐리고 겨울바람이 거세던 날, 수프는 여유 없는 마음에 따듯한 기운으로 틈을 만들어 주었다. 그동안 만들었던 고구마 감자, 단호박 수프와는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은은함이었다. 첫맛은 적당한 묽기와 고소함이었다. 당근 수프라는 이름표가 없었다면 모를 정도다.
그렇게 한 주를 보내고 집에서도 만들었다. 적당히 썬 당근과 양파를 올리브유에 볶은 다음 생크림과 우유를 넣고 끓이다가 블렌더로 갈았더니 점차 노란색으로 변했다. 수프 옆에는 방금 만든 김밥이 있다. 둘은 가벼움과 적당한 무게감으로 서로를 보완해 주며 어울렸다.
수프를 끓이는 일은 즐거웠다. 경험한 것을 다시 내 공간에서 만들어 보는 건 작은 설렘이었다. 다른 것에는 이리도 부지런하지 않다. 익지 않은 어려운 일들에 씨름하는 건 부담스러워서 우선 피한다. 요리는 낯설기에 잘되지 않을 수도, 다음이라는 기회가 있음을 전제하면서 나선다. 좋아하는 일에는 상황변화를 받아들이는 일도 자연스럽다. 다른 일에도 당근 수프를 끓이는 기분으로 다가갔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