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기록 수프 카레

어느 날을 불러오는 음식

by 오진미

음식은 기억에서 출발한다. 내 식탁에 올려진 대부분은 어딘가에서 만났던 것들이다. 직접 먹어보지는 않아도 눈으로 봤을 음식이다. 때로는 잡지 속 요리 사진이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는 호기심과 용기를 준다.


수프 카레를 만들었다. 대전의 어느 식당에서 그것을 먹은 지 3년이 다 되어간다. 늦겨울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였다. 한바탕 소란이 일고 간 식당은 고요했다. 평소였다면 기다림은 당연할 만큼 인기인 그곳 문을 열자마자 자리에 앉는 행운을 만났다.


밥 위에 적당히 튀겨진 브로콜리와 단호박, 파프리카가 올라가 있고, 이국적인 향이 특징인 카레가 뿌려졌다. 집에서 먹던 카레의 맛과는 완전히 다른 것. 깊으면서도 살짝 올라오는 향은 낯섦 속에서도 살아서 각인되었다. 맵다는 것과 동시에 다른 맛. 지금은 가물가물해진 그것이 문득 생각나는 날이 있다.


내가 맛본 카레비법을 찾아보았다. 자료에는 그럴 것이라 여겼지만 역시 여러 향신료가 들어가야 한다고 설명되었다. 어느 책에서 봤던 것도 떠오른다. 카레는 향신료의 조합이라는 것. 내가 잊지 못하는 맛에 가까이 가고 싶었으나 그것을 찾는 노력에는 이르지 못했다.

대신 나만의 스타일로 만드는 조금은 편한 방법을 택했다. 이름도 내 맘대로, 만드는 과정도 마음이 가는 쪽으로 행하면 된다. 그래서 난 부엌에서 자유로워지고 다른 곳에서는 못하는 여러 가지를 풀어낸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음식의 재료다. 양파 하나를 채 썰어서 기름에 충분히 볶다가 당근도 더했다. 양파는 갈색이 나고 당근은 더 투명해질 정도로 20여 분을 충분히 보내고 나서는 물을 넣고 끓였다. 그러다 블렌더로 갈았다. 아이들은 당근을 좋아하지 않아서다. 그 시절이 지나면 조금 거리가 좁혀지지 않을까. 나 역시 지금처럼 당근을 찾아 먹을 정도가 된 것은 오래지 않다.


냄비에 국물이 보글거리면 토마토를 하나 썰어서 약불로 끓인다. 브로콜리와 단호박은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올리브유를 뿌리고 오븐에서 구웠다. 닭다리살은 생강술과 소금으로 밑간 해둔 다음 팬에 기름을 붓고 앞뒤로 노릇한 색이 나올 정도로 구웠다. 고기가 거의 익어갈 무렵 먹다 남은 화이트 화인을 넣었다. 고기 잡내를 없애고 맛은 충분히 올라오도록 하는 일이다.


카레가루는 토마토가 다 익고 국물에 스며들 때쯤 넣고는 우유도 한 컵반 정도를 부었다. 이때 우유는 인스턴트카레에서 나오는 강한 맛을 중화시키며 부드러움을 더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간이 맞는 걸 보면서 시판 음식에 들어있는 강한 맛에 놀란다. 이것이 일상에서 다양한 맛을 느끼기 어렵게 하는 장벽일 수도 있다는 막연한 생각도 함께다.


밥도 뜸이 들었다. 한 그릇을 위한 모든 준비가 다 되었다. 파스타 그릇에 밥을 적당량 넣고 카레 국물을 올렸다. 여기에 다른 채소와 닭고기를 놓으니 기다리던 카레다. 모든 재료가 지닌 제 맛이 살아나도록 따로 익히는 방법을 택했다. 서로 다른 존재임을 확실히 인정해 주는 것. 그래야 재료가 지닌 특징을 확실히 보여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모든 걸 한 그릇에 넣고 익혀도 되지만 그러면 다름을 보존하기 어렵다. 바쁠 때는 이 방법도 추천한다. 시간 절약이 당장 중요한 일이라면 그리 해야 마땅하다. 빨리 먹고 어디를 가야 하거나 급한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현실을 망각한 고집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다 이날처럼 시간이 허락하는 날은 한번 해볼 만하다. 내가 간직하고 있는 맛과 어떻게 다른지를 마음속으로 검열해 보는 것도 괜찮다. 비록 바라던 요리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어느 한때 좋았던 시간을 식탁에 올려놓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즐거움이다.


그리고 보면 많은 것들을 잊고 산다. 내가 만들었던 음식 역시 상당한데도 매일 무엇을 먹어야 할지 떠오르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문득 언젠가 먹었던 것이 바람 불듯 지나면 기분이 좋다. 그건 하루 어느 때를 빛나게 해 줄 선물을 만난 것과 같다. 이때마다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야 원하는 날, 기대하는 음식을 마주할 수 있어서다. 내가 먹는 밥은 내 기억과 망각, 기록의 어느 틈에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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