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검고 초록빛 상추다. 로컬푸드 매장에 가보니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게 이 녀석이다. 한 봉지에 천 원. 요즘처럼 밥상 물가가 고공행진을 할 때는 만나기 어려운 착한 가격이다. 부지런한 농부가 아침부터 하우스에서 따온 듯 싱싱하다. 한 봉지를 바구니에 담았다.
그렇게 냉장고 야채 박스에서 하루를 보냈다. 일요일, 하늘은 완연한 봄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햇살은 따듯하고 집 안에 머물러 있는 게 어색할 정도다. 맛있는걸 대충 챙겨 넣고 밖으로 나가야 될 것만 같다. 코로나는 어디론가의 이동에 불안감을 키웠고 병원에 다녀온 남편 역시 집에서 쉬어야 했기에 하루 종일 온 식구가 함께 했다.
아이들은 각자의 방에서 뭘 하다가 티브이를 보러 오가며 조용 하지만 바지런히 움직인다. 아침을 먹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또 점심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간단히 자장면을 시켜 먹어도 좋으련만 병원 신세를 진 남편에게 무리가 갈까 그럴 수도 없다. 이때 상추가 생각났다. 가능한 부담 없이 잘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비빔밥이 떠올랐다.
보리쌀을 많이 넣은 보리밥에 상추와 당근, 표고버섯, 돼지고기를 조금 넣고 간단히 만들기로 했다. 재료 가짓수가 많아질수록 손이 많이 필요하고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요리하는 과정에서 몸에 무리가 가게 되면 꼭 주변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게 된다. 그러고 싶지 않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면 좋겠지만 그럴 수도 없으니 나를 편안하게 하면서 적당히 만들기로 했다.
야채부터 씻는다. 상추와 당근 버섯을 차례대로 샤워시킨 다음 가지런히 썰었다. 상추는 칼보다는 손으로 잘라야 더 맛나다. 버섯과 당근은 채 썰어 두었다. 마지막은 돼지고기 등심을 적당한 굵기로 썬다. 고기는 냉동실에 두었다 해동시키는 과정이라 칼이 잘 들어간다. 재료 손질 과정이 끝나면 야채부터 볶는다. 팬에 올리브유를 아주 조금 두른 다음 달궈지면 버섯과 당근을 넣고 볶는다. 이때 소금을 조금 뿌려주면 끝이다. 고기는 간장과 소금 매실액과 설탕, 참기름에 물을 조금 넣고 볶는다. 팬에 기름보다는 물을 넣으면 고기를 빨리 익히는 동시에 칼로리를 낮출 수 있다. 마지막으로 상추 샐러드를 만들면 끝이다. 볼에 간장과 매실, 식초 조금, 깨소금, 참기름을 넣은 다음 상추와 부츠를 넣고 버무린다.
갓 지은 밥을 넓은 그릇에 담는다. 식탁 위에 준비된 것들을 각자가 원하는 만큼씩 밥 위에 올려놓는다. 계란 프라이를 올리고 참기름과 양념고추장을 적당량 넣어주면 한 그릇이 완성된다. 동글동글 보리가 잎 안에서 톡톡 터진다. 그리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부드럽고 고소하다. 평소 같으면 야채에 그리 관심을 보이지 않을 아이들이 맛있다면 숟가락이 바삐 움직인다.
비빔밥은 언제나 실망시키지 않는 한결같음이 있다. 어떤 것이 어우러지든 평균 이상의 맛을 전해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별 반찬이 없을 때 집에 있는 여러 가지를 한데 모아 쓱쓱 비벼 먹는 비빔밥을 선택했는지 모르겠다.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는 순간 각각의 것들이 살아나지만 어느 것 하나가 특별히 튀지 않으며 독특한 맛을 창조해 낸다. 그러니 자꾸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집집마다 특색이 담겨 있으니 지루함도 없다.
일요일 점심은 한 주를 마무리하는 동시에 새로운 시간을 준비해야 할 때다. 회사나 학교를 가지 않기에 편하지만 내일 생각에 머리가 아파온다. 특별할 것도 없지만 그냥 매일 먹던 밥으로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으니 가능하다면 새롭고 기분 좋아질 먹거리를 찾게 된다. 자기 앞에 놓인 그릇에 수저를 들고 적당히 힘을 주고 비비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도 풀린다. 내가 그러했다. 별생각 없이 숟가락을 들고 열심히 오가기를 하고 있는데 그릇 안에 온갖 색이 펼쳐지는 게 아닌가. 빨강과 초록 주황, 갈색, 노랑, 하양에 적당히 윤기가 흐른다. 화가가 물감으로 캔버스를 채워가듯 비빔밥에는 밥과 여러 야채와 고기가 그릇을 꽉 채우며 살아있는 그림을 그린다. 그 모습만으로 어여쁘다.
비빔밥은 어울림의 삶과 닮았다. 평범해 보이지만 여러 사람들과 잘 어울려 그들의 얘기에 귀 기울여주며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는 참 매력적이다. 밥을 비비다 보니 아이들이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비빔밥처럼 소탈한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전혀 다른 것들이 만나도 문제가 없는 비빔밥처럼 내일도 잘 흘러갔으면 좋겠다. 일요일 하루도 비빔밥처럼 지나간다. 잘 비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