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잠을 깨운 성장기
방학이여 안녕

# 20

by 오진미


겨울방학이 끝났다. 46일간 큰아이가 학원을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날 모든 시간을 함께 보냈다. 아이들의 방학 즈음 걱정과 불안으로 하루를 보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아이들은 방학이기에 축제처럼 들떠 있었지만 난 겨울잠을 자기 위해 깊은 굴속으로 들어가는 곰처럼 생기가 없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 매일 가능한 무엇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새해의 첫 주를 눈 깜짝할 사이에 날려 보내고 둘째 주는 그래도 새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고 살짝 다짐해가며 몸과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다 셋째 주에 접어든 금요일, ‘밥’이라는 단어가 스쳤다.


난 엄마고 가끔 일하지만 전업주부다. 그러니 매일 삼시세끼를 챙겨주는 겨울방학을 내 글로 옮겨 보자고 마음먹었다. 특별히 준비해야 할 것도 없었다. 아이들이 만들어 달라는 것, 내가 하고 싶은 음식과 그를 둘러싼 이야기를 기록했다.


처음 나를 움직이게 한 건 눈 오는 날 만두 만들기였다. 밖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려 눈안개가 온 동네를 감쌌다. 점심을 한두 시간 남겨놓고서 거실에 둘러앉아 김치만두를 빚었다. 두 아이가 함께했던 터라 한 시간을 조금 넘기니 다 만들어졌다. 그것으로 점심을 하고 나서 다시 쓰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았다.


처음에는 어느 한 끼를 책임졌던 밥, 음식에 관한 이야기로 머물 거라고 생각했다. 첫 글을 브런치에 발행하고 하나둘 시간이 흐를수록 내게는 먹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 삶과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성장기였다. 운전은 언제나 힘들지만 요리는 자신 있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던 내가 어깨에 힘을 빼고 부엌에서 어떻게 설 수 있는지 들여다보게 되었다.

어설프지만 휴대전화로 음식 사진을 담으며, 재료마다 지닌 자연 그대로의 색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대충 먹자는 생각은 조금씩 멀어져 갔다. 아이들의 밥상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하루이기에 어제와 다른 먹거리로 세상을 만나게 하고 싶었다. 특별할 것 없지만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한 그릇을 식탁 위에 올리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되어준 일기였다.


겨울방학 밥 일기는 돌이켜 보니 방학의 절반에 못 미치는 시간이었지만 나를 살아있게 했다. 코로나로 여행 한 번 못 간 아이들과 무장해제된 상태로 소통하고 나누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숟가락을 들어 한입 먹고는 맛있다고 하는 미소 가득한 얼굴에서 행복을 찾았다.


일기라는 이름처럼 매일의 기록이 되진 못했다. 가끔 귀찮음과 별 이야기가 아닐 것 같은 생각에 글을 멀리했다. 처음의 마음처럼 어제와 같지 않은 오늘이기에 조금 더 열정 가득히 달려오지 못한 게 아쉽다. 그럼에도 겨울을 빛나는 계절로 만들어 줘서 고맙다.


밥은 단지 먹는 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뭘 먹지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날의 기분과 날씨, 여러 매체를 통해서 간접 경험했던 먹거리, 집에서 조리 가능한 메뉴, 아이들의 눈높이 등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요소들이 영향을 미쳤다. 이건 세상을 사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과도 비슷했다. 어느 지점에서는 반드시 선택해야 했기에 매일 아이들은 의견을 모으고 내게 전달했다. 가족 안에서 공통의 관심사를 발견해 내는 일이었고, 그것을 따뜻한 김이 나는 음식으로 경험하는 멋진 세상이었다.


아이들에게 가깝게는 일 년, 먼 십 년 후 이것을 통해서 겨울방학의 풍경을 다시 들여다보는 작은 갤러리가 됐으면 한다. 아이들의 겨울 축제인 방학은 막을 내렸고, 여름을 기다려야 한다. 그때도 다시 일기를 쓸 수 있을까?

아이들은 방학 마지막 날 홍차 쿠키를 구웠다. 며칠 전부터 계획했던 일을 일요일 오전부터 부지런히 실행해 옮긴 셈이다. 언니와 동생이 주고받으며 버터를 녹이고 반죽하고 모양을 만들고 굽기까지의 과정은 어둑해진 주말 날씨를 뒤로하는 풍경이었다. 콕콕 박힌 홍차 잎에서 나는 은은한 향이 입안에서 감돌았다. 부드러우면서 기품 있다. 아이들이 쿠키를 내민 순간 방학 동안 차린 밥상에 대한 감사 인사처럼 여겨졌다. 겨울은 갔고 봄이다. 아이들은 학교 가는 일이 많아질 거고, 그렇게 보내고 나면 다시 여름이 찾아오겠지. 아직은 먼 미래의 약속이지만 여름방학을 기대해 본다. 그러려면 3월의 첫날, 오늘부터 귀하게 나를 생각하며 살아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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