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봄동전&유채
잠결에 비 소리를 들었다. 강하지 않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몸을 이불속에 머물게 한다. 새해가 되고 한 달이 가버렸다. 지난 12월은 병원을 다니는 일로 정신없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일상으로 돌아올 용기를 주었다. 매일 아침을 맞고 저녁을 보내고 다시 아침을 만나게 되는 하루가 고맙다. 당연하다 생각되는 지금의 하루를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아침의 시작은 매일 똑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같은 듯 다르다. 밥통에 밥이 없다면 밥을 안치고 냉장고 문을 열어 지금 쓸 수 있는 반찬의 가짓수를 확인한다. 언제나 별로 먹을 게 없다. 야채 박스를 열고 재료를 확인한 다음 무엇을 먹을 것인지 즉각적으로 결정한다. 자기 전 내일 반찬을 미리 그려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이렇게 임기응변식이다.
위층 언니가 주고 간 마지막 봄동 배추가 눈에 들어왔다. 간단하지만 언제나 맛을 보장해주고 먹는 이를 기분 좋게 해주는 음식 봄동 전을 만들기로 했다. 배 추 양이 적은 까닭에 달랑 하나 남은 고구마도 함께다. 완도 해풍을 맞고 자란 봄동은 은근히 달고 부드러우면서 빛깔이 곱다. 초록과 연두, 은은한 노랑과 하양 몇 가지가 그러데이션을 그려놓듯 흘러간다.
흐르는 차가운 물에 깨끗하게 씻었다. 고구마도 껍질을 벗겨놓고는 어슷하게 썰었다. 밀가루 물을 얇게 풀어놓고는 재료들을 담갔다. 식용유를 팬에 두르고 잎 하나씩을 올려놓는다. 이른 시간에 고소한 기른 냄새로 기분이 좋다. 지글거리는 소리에 녀석들을 더 부드러워지고 밀가루 옷을 입고 익혀지는 동안 달콤한 맛이 더 강해진다.
고구마도 마찬가지다. 결혼 전에는 고구마전을 몰랐었다. 시댁에선 설이나 추석에 이 음식을 식탁에 올렸다. 별로 기대 없이 먹었는데 부드러우면서도 계란을 만난 고구마는 또 다른 느낌이다. 오늘은 계란 대신 밀가루로 했지만 둘 다 괜찮다. 고구마의 노란 속살이 더 빛나고 바삭해져 밥과 김치와도 잘 어울리는 반찬으로 변신한다.
오늘은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여기에 시금치나물도 덧붙였다. 이것 역시 섬의 기운을 맞고 자란 섬초다. 일반 하우스 시금치에 비해 튼튼하다. 뿌리가 억세고 잎들도 쉽게 물러지지 않는다. 설탕을 발랐다고 할 만큼 보라색 뿌리 부분의 단맛은 놀라울 정도다. 집집마다 나물을 만드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난 언제나 가장 최소화한 재료만을 곁들인다. 덜 짠 양조간장에 참기름이면 끝이다. 가끔 깨소금을 함께 하기도 하지만 없어도 좋다.
식탁을 차렸다. 시골 어느 집의 텃밭을 옮겨놓은 기분이다. 수요일이면 입춘이라는데 우리 집에는 이미 봄이 왔다. 파릇파릇한 새싹들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의 색들이 그러하다. 담장 위를 날아다니는 개나리꽃은 아니지만 따뜻한 온기를 품은 봄, 은은한 노랑 빛의 하모니가 훌륭하다. 밥이 보약이라는 말처럼 이것을 먹으면 하루를 잘 보낼 수 있는 힘을 얻어 갈 수 일을 것만 같다.
아 참 잊고 있었다. 어제저녁에 만들어 놓은 유채 겉절이도 함께 올렸다. 유채 하면 고향 제주도의 봄이 그려진다. 3월을 보내고 4월 중순에서 5월 어느 즈음까지 섬을 수놓는 노란 물결의 주인공이다. 큰 키를 자랑하며 바람에 살랑거리는 모습은 파란 하늘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이다. 지난 금요일 동네 로컬푸드 매장에서 우연히 유채를 보는 순간 기뻤다. 이국 타향에서 동네 이웃을 우연히 만난 것 같은 기분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망설임 없이 장바구니에 넣었다. 하루를 보내고 주말 저녁에 사과와 함께 간장 소스에 버무렸다. 간장과 식초, 매실, 참기름 한 방울과 깨소금을 넣었다. 아삭하면서도 싱그러운 풀향과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었다. 볼수록 기분 좋아지는 음식이었다.
시계는 7시를 달려간다. 방학이라 아직도 꿈나라인 막내는 그냥 두기로 했다. 남편과 큰 아이가 함께 앉았다. 몇 가지 나물반찬을 올렸을 뿐인데 식탁이 풍성해졌다. 혼자 들뜬 마음이다. 고기반찬을 올려야 할지 망설이던 시간이었다. 사다 놓은 고기가 없으니 참치캔으로라도 대신할까 고민하다 몸에 좋고 집에 있는 것들을 활용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차려진 식탁이었다.
아는 언니가 준 보라색 나는 동치미까지 더해져 식탁은 아름다웠다. 아삭한 무의 식감에 고추 마늘, 갓이 어우러진 국물 맛은 밥과 함께 어우러져 묘한 여운을 남긴다. 김치통 두 개를 들고 왔던 언니의 모습도 그려졌다. 올해로 방송 10년을 맞이한 한국인의 밥상에서 그려내는 풍경도 이와 비슷하다. 삶 속에서 우리와 함께 했던 음식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그 감정들을 뭉클하거나 슬프게 때로는 기쁘게 다양한 모습으로 풀어낸다.
내가 오늘 올렸던 아침밥상도 저 깊이 머물러 있는 마음을 오롯이 담았다. 한 달의 출발을 위한 준비의 시간, 이 밥 한 그릇으로 30일을 버텨나갈 첫 기운을 얻어갔으면 했다. 봄에는 잠들었던 세상 만물이 깨어난다고 하지 않는가. 겨울을 슬기롭게 잘 보낸 봄동과 시금치와 작지만 강한 그들의 소박한 에너지가 이 밥상을 통해 몸으로 잘 흘러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