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지난겨울방학에는 아이들과 차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아침을 먹고 무엇을 하다 10시가 되면 작은 상 앞에 모여 앉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밀크티를 만들기도 했고 코코아, 우유 등 집에 있는 것을 차려놓고 아이들 간식으로 사다 놓은 쿠키 몇 조각을 올려놓으면 멋있는 찻 상이 만들어졌다.
특별한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다. 매일 하루 종일 붙어 있다 보니 특별히 할 얘기도 없다. 하루에 해야 할 일을 얘기하거나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거나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도 있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을 보내니 그 시간 즈음이면 막내가 얘기한다.
“엄마 우리 티 타임 할 시간이야.”
습관처럼 모였고 30분 남짓한 시간을 같이 있었다. 함께 있어서 그냥 좋았던 날이다.
오랜만에 그 시간을 가졌다. 시작은 아침부터 시작된 팬케이크 만들기였다. 어제 리소토를 만들기 위해 사다 놓은 생크림이 유통기한이 문제였다. 5일까지 라니 며칠 남지 않았다. 그 기간을 넘기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다. 큰아이가 갑자기 생각이 떠올랐다.
“엄마 내일 우리 아침에 팬 케이크 만들어요. 생크림으로 머랭 만들어서 올리고.”
9시부터 시작됐다. 아침을 먹은 지 딱 2시간이 지났다. 핫케익 가루를 풀고 우유와 계란 하나를 넣고는 잘 저었다. 적당히 묽은 반죽을 만들고 굽기 시작한 게 모두 아이의 몫이었다. 난 초등학교 시절부터 음식을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덤벼들었다. 호기심과 먹는 것을 좋아하는 까닭이었다. 가게에서 파는 카스텔라 빵에 계란물을 묻혀 프렌치토스트 만들기에 나설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다.
우리 집 큰아이를 보니 어릴 적 내 모습이 겹쳐 스친다. 아이는 이제 중학교 2학년이다. 세상을 보는 눈도 생기고 제법 자기 의견을 잘 말한다. 대충대충 듣고 넘어가는 나와 달리 자세히 정확하게 기억하는 까닭에 도움을 많이 받는다. 지금은 내 소중한 리뷰어가 돼 주고 있어 더할 나위 없이 고맙다. 팬에 반죽을 붓고 불 조절을 하는 손이 떨리는 듯하다. 워낙 침착한 스타일이라 서두름이 없다. 잠깐 모양이 엇나가도 짜증을 내지 않는다. 나였다면 순간 분위기가 싸해질 정도로 감정을 표출했을 터인데. 마음을 다잡고 기다리는 눈치다. 그러다 보니 제법 그럴싸한 모양으로 정상궤도를 찾아간다.
팬케이크 3장을 부치는 중이다. 마지막 한 장을 남겨 놓았으니 이제 내가 나서야 할 때다. 생크림과 설탕을 넣고 거품기로 열심히 돌렸다. 물컹했던 것이 몇 번의 충격을 거치고 나니 점점 묵직해진다. 신호를 보낸다. 점점 물기는 사라지고 하얀 거품 같은 크림이 만들어졌다. 막내가 어느새 옆으로 왔다. 언제나 그러하듯 크림 맛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엄마 나 먹어봐도 돼?”
이때 손가락에 크림을 묻혀 입으로 갖다 댄다.
“와아 맛있다. 고소하고 정말 잘 됐네.”
아이와 나눠서 하니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다. 딸기를 썰어서 넣기로 했다. 적당한 두께로 슬라이스 했다. 이제 팬케이크와 크림 딸기가 잘 어울리게 꾸며주기만 하면 끝이다. 모두가 함께 손을 걷어붙였다. 큰 애는 크림을 적당히 펴 바르고 나와 막내는 딸기를 예쁘게 올려놓았다. 한 장 한 장 올라갈 때마다 기쁨이 샘솟는다. 예쁘다. 하얀 겨울 눈꽃 맞은 붉은 동백꽃이 그려진다. 귓불이 얼어버릴 것 같은 추운 날에도 동백은 진한 분홍, 때로는 그보다 강한 붉은빛으로 숨 죽은 눈 오는 겨울을 빛나게 해 주었다. 햇빛이 쏟아지는 아침이지만 바람은 어느 때보다 차다. 햇살 사이로도 찬 기운이 느껴질 만큼 추운 날이다. 이제 케이크가 완성되었다.
붉은듯하면서도 갈색 나는 홍차가 생각났다. 1월 중순에 주문해둔 잉글리시 에프터눈 티를 준비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받은 것처럼 행복하다. 아이들의 얼굴도 환해진다. 하얀 크림과 빨간 딸기, 잘 구워진 케이크가 우리에게 익숙한 하루를 새롭게 열게 한다.
오랜만에 마시는 홍차다. 투명한 찻 물과 그 향이 달콤한 케이크에 취하게 한다. 카페에서 사 먹던 맛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이는 스스로 완성했음에 자랑스러워한다. 눈이 호강하는 순간이었다. 맛보기 전에 색으로 많은 것을 말해준다. 큰아이 방에서 자라는 애플민트 잎 하나를 따서 올려놓으니 풍성하고 싱그럽다.
순간 그 많던 게 어디론가 사라진다. 짧았던 시간이어서 더 아름답다. 지난겨울 서울 익선동 골목에서 만났던 동백꽃이 아름다운 카페가 생각난다. 그 집 대표 메뉴가 아마 수플레 팬케이크였다. 딸기 한 조각을 올린 그것은 우리 모두의 감탄을 연발하게 했고 참 맛있게도 먹었다. 그 후로 집에 돌아와서 두 번 정도를 만들었는데 그때 역시 그 빛깔에 감탄했었다.
언제부턴가 겨울 초입에서 딸기가 나왔다. 비닐하우스에서 키워진 농부의 정성이 가득 담긴 것일 테지만 따뜻하고 싱그러운, 윤기 흐르는 그 모습에 잠시 멈춰서 감상하게 한다. 먹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봄에 먹는 딸기보다 겨울의 그것이 특별해 보인다.
우리 집이 카페로 변신했던 아침이 지나고 하루의 중반을 훌쩍 지났다. 그래도 마음이 설렌다. 내 폰 사진첩에는 오늘의 기록이 몇 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케이크는 왠지 모르게 기분 좋게 하는 마법이 있나 보다. 어릴 적에는 너무나 귀한 것이어서 가까이할 수 없었기에 동경했고, 커서는 한 입 먹는 순간 달콤함에 근심 걱정을 사라지게 하니 우울한 날이면 찾게 되는 특별한 것이 되었다. 몇 번의 모닝티를 방학 동안 해야겠다. 지금 여기, 오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