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밀크티가 생각났다. 홍차는 충분한데 꼭 있어야 할 우유가 없다. 한걸음에 다녀올 수 있는 마트가 있지만 아침 공기는 어제처럼 차갑다. 나가는 일이 귀찮다. 먹고 싶지만 몸을 움직이기는 싫은 상황이다.
막내가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더니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밀크티 얘기를 꺼낸다.
“집에 우유 없는데.”
“엄마 내가 다녀올게. 나도 이제 3학년이잖아. 나 할 수 있다니까.”
아이가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사는 일은 큰 문제가 없다. 가는 과정에서 차들이 워낙 쌩쌩 달리는 게 걱정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동안 심부름을 시키기보다는 직접 내가 하고 말았었다. 가끔 마트 앞에서 작은 사고들이 일어나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망설여 왔다.
아이는 껑충껑충 뛰며 자기가 가겠다고 한다. 조심히 천천히 다녀오면 자기도 이제 할 나이가 됐다고 설득한다. 아이를 마트에 보내기로 했다. 마음을 졸이고 과도한 염려에 모든 걸 제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당연히 알아야 하고 쉽게 필요한 것을 사는 일은 최소한의 사회화 과정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다녀와. 근데 차가 보이면 절대 먼저 지나려 하지 말고, 차가 지나면 천천히 가야 해!”
단단히 일렀다. 아이는 신났다. 언제부턴지 아이는 무엇을 사러 갈 때면 메모를 했다. 노란 메모지에 사야 할 것을 연필로 꼼꼼히 적는다. 장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섰다.
“엄마 내가 가서 볼까?”
큰 아이가 동생이 걱정됐는지 묻는다.
“아니야. 천천히 잘 해낼 거야. 기다려 보자.”
조금 있으니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 나 다녀왔어.”
아이의 목소리가 우렁차다. 씩씩하게 잘 다녀왔다고 폭풍 칭찬을 해 주었다. 유통기한도 꼼꼼히 살펴 우유를 사 왔다.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과 과자도 골라왔다. 아이에게 그 시간이 자유였나 보다.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 설레는 도전이었던 것 같다.
우유를 냄비에 넣고 데웠다. 따로 찻물을 우려내야 하지만 오늘은 쉽게 가기로 했다. 홍차 잎을 충분히 우유에 넣었다. 아주 약한 불에서 은근히 끓여주었다. 좀 있으니 우유 냄새와 홍차 향이 살며시 퍼져 나온다. 나무 스푼으로 적당히 저어주었다. 하얗던 게 점점 갈색으로 변해 간다. 보글보글 끓어가는 중이다. 진한 갈색 설탕을 더했다.
밀크티 완성이다. 달콤하고 부드럽다. 막내의 적극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그냥 지날 일이었다. 찬 바람을 뚫고 다녀온 아이가 고맙다. 내 생각에는 어려 보이는 아이가 이제는 나도 모르는 사이 훌쩍 자랐다. 아이들도 오랜만에 밀크티를 마셨다.
“엄마 오늘 아침 밀크티 정말 맛있는데요.”
조용한 집안에 리듬이 생겨난다.
어떤 일이든 과정이라는 게 존재한다.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는 이룰 수 없기에 결과보다도 중요한 게 단계를 밟아가는 순간이지 않을까. 타샤 튜더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필수적인 게 끊임없이 인내하는 것이라고 했다. 참기 어려운 순간이 있을지라도 그 과정들을 슬기롭게 기다리고 살다 보면 보상이 따라온다고 했다. 평생의 일이 견디어 내는 힘이라고 했던 그녀의 말이 생각났다.
집에서 간단히 차 한잔을 마시는 일에도 나름의 생각과 단계라는 게 필요했다. 무심코 지나치기에 그것들을 특별하지 않다고 여길뿐이다. 나도 아이처럼 새롭게 뭔가를 해 보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망설여지고 주저하고 생각이 많아진다. 우선 시작하고 볼 일이다.